다정한 안부를 늦게서야 열어보았다. '어떻게 지내?’ 하고 묻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미안한 일이어서, 몇 마디를 쓰다 지우다 결국 보냈다. 나의 아버지 안부까지 물어준 사람이었기에, 애매하게 대답했다. 부고는 끝내 전하지 못했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서운해할까 봐, 미리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얼버무린 답장이 어색할 줄 알면서도, 그냥 그러고 말았다.
그날, 부고를 돌리다 말았다.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진 탓도 있었지만, 연락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래된 관계들은 서먹해졌고, 새로운 관계는 제대로 맺지 못한 채 작은 세상 안에서 조그맣게 산다. 그게 편해서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겠다. 타인을 이해하고 이해받는 일은 버겁게만 느껴진다. 언젠가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무빈소 장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시를 읽는다. 나의 방명록엔 어떤 이름이 적힐까 상상해 본다. 한 장도 채우지 못해서 방명록이 필요하지 않을 것도 같다. 아, 무빈소장례에는 방명록도 필요하지 않겠구나.
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 금기형, 박상대, 박상미, 신천식, 샘말 아저씨, 이상봉, 이희창, 양상근, 전경선, 제니네 엄마, 제니네 아빠, 채정근. 몇은 일가였고 다른 몇은 내가 얼굴만 알거나 성함만 들어본 분이었다 "네가 언제 아버지 뜻을 다 따르고 살았니?"라는 상미 고모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봄 있었던 아버지의 장례 때 나는 모두에게 부고를 알렸다 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
- 박준, 「블랙리스트」, 『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