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집 장식장에서 큰 아이가 유치원 때 드렸던 편지를 찾았다. 누렇게 변했지만 초록 손잡이 매단 가방에 초록 글씨. 종이가방 속에는 만든 꽃이 들어있다.
아버지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신다. 고칠 것이 없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핀다. 나사가 풀려 덜컹거리는 아이 침대를 보시고는 철물점에 가서 이름도 모를 꺽쇠 금속을 사 오신다. 전동드릴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툭툭, 박아 넣는다. 날카로운 것이 남아 아이 다치지 않을까 여기저기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마무리를 하신다.
그 사이, 나는 호박전을 부친다. 애호박을 일 센티 이하로 썰고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려 물기를 빼낸 뒤 부침가루, 계란물을 입혀 노릇노릇 지진다. 간장에 식초와 후추를 떨어뜨려 곁들이면 아버지는 후후 불면서 드신다. 혼자서도 호박 한 개로는 부족하다. 커피 한 잔을 드시고 부지런히 일어나신다.
아이들을 배웅 나가신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함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선생님에게 우리 할아버지라고 자랑한다. 아버지는 선생님께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두 아이를 양손에 매달다시피 하고 들어오신다. 아버지가 사 오신 각종 과자며 선물들을 풀어보느라 소란스럽다.
“뭘 이렇게 돈을 쓰셨어요. 이게 다 돈이 얼마야!” 내가 한 소리를 하면
“이런 게 사는 재미지. 아이들 좋아하는 거 보는 게 내 낙이다!” 하신다.
아이들은 나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한다. 아버지가 오시는 날엔 내가 할 일이 없다. 집안은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은 서로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고 아버지는 아이들 칭찬하시느라 바쁘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시고, 좋아하시고 신이 난 아이들은 미주알고주알 서랍 속에 책꽂이에 있던 것들을 꺼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버지는 또 묻는다.
“뭐 해줄 거 없니?”
그때 나는 칼을 꺼내놓는다. 작은 칼, 큰 칼 모두. 아버지는 가위까지 다 갖고 오라고 하신다. 숫돌을 물에 담가두고 조심스레 칼을 갈기 시작하신다. 힘을 너무 주어도 안 되고, 덜 주어도 안 되는 균형과 집중의 기술. 속도에 욕심내지 않고 지루할 정도로 오래 갈아야 한다. 칼 끝을 손끝으로 만져보시고는 말씀하신다.
“손 조심해라. 아주 잘 들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 또 바쁘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시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전쟁에서 이긴 병사들처럼 의기양양하게 아버지 손을 잡고 나간다. 뒤에서 바라보면 작은 아이들 그림자와 큰 아버지 그림자가 나란히 이어져 그 길이 끝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이런 세상에 걱정거리란 하나도 없을 것만 같다.
몇 시간이 지나면, 또 아이들을 데리러 나가신다. 오는 길엔 문구점도, 슈퍼도 또 들르신다. 양손 가득 들고 돌아오시는 아버지, 입이 귀에 걸린 아이들. 엘리베이터 올라오기 전부터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왜 또 사주세요. 이게 돈이 얼마야!”
내가 투정하듯 웃으면
아버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신다.
하루, 혹은 이틀 지내시다가 돌아가신다. 아이들이 있을 때 가시면 울며 매달리기 때문에 유치원 끝나기 전에 출발하신다. 나는 차 타시는 곳까지 바래다 드린다. 출발 전,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신다. 나는 차가 멀리 가도록 손을 흔들고 아버지도 고개를 돌린 채 오래오래 손을 흔드신다. 혼자 계실 집이 얼마나 적막할지 눈에 보이는 듯하여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칼이 무뎌질 때마다 아버지 생각을 한다. 아버지보다 칼을 더 잘 가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