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오는 슬픔

by 김박은경

아버지 돌아가신 지 49일. 일요일에는 아버지를 뵙고 왔습니다. 날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렜습니다. 설렌다는 말이 괴이하게 느껴집니다.


실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아버지 집은 서울인데 우리는 용미리로 갑니다. 골목도 낯설고 대문도 없습니다. 없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도, 푸른 정원 어디에도 아버지는 안 계십니다.


온통 진초록입니다. 여기저기 돗자리며 먹을 것을 들고 가는 사람들, 이미 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날 고인을 모시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없더군요. 묘역이 다 찼다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근조 차량도 상복을 입은 사람도 유골함도 영정 사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환하고 바람이 불고 고요합니다. 묘지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공원인가 봅니다.


아버지의 잔디는 듬성듬성, 면도하다 만 그의 얼굴 같습니다. 준비한 향을 피우고 좋은 곳에 가시기를 빕니다. 이럴 때 어떻게 기도하는 건지 아버지께 여쭤봐야 하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향은 가져간 돌멩이에 꽂아서 피웠습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돌입니다. 어느 먼 나라의 바닷가에서 주우신 거라고 했는데,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특별한 모양입니다. 어느 바다인지 잊어버려서 다시 여쭙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다 함께 한정식집에 갑니다. 그 자리에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상합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진짜 아버지는 집에 계실 것만 같습니다. 입구에 진열된 포장 음식을 사 갖고 아버지께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뭘 잘 드실까 고르고 있습니다. 멈춰 서서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쉽니다.


스스로가 많이 이상한 날들입니다. 엄마 가시고는 매일 울었는데 아버지 가시고는 적게 웁니다. 그게 괘씸하고 서운하고 죄송합니다. 그걸 곰곰 생각하다 보면 결국 울게 되는데 슬픔은 그런 게 아니지 않던가요. 슬픔은 저절로 터지는 것,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러다 이런 생각도 합니다. 제가 겪고 있는 애도의 모양이 다르다고요. 사랑이 적어서가 아니라 슬픔이 다른 모습으로 와서 헷갈리는 것이라고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제 안의 울음이 앞에 나섰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현실 부정이 먼저 나온 것일 수 있다고요.


실감이 안 나서 이상해 하는 마음은 슬픔이 아직 깊숙이 잠겨 있는 상태일 거라고요. 죽음 후에 안도감이 온다면 그것은 몹시 힘들어하시던 모습들에 함께 힘들어하던 제 마음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식이라고요.


또한 엄마는 나를 돌봐줬던 사람이고 아버지는 내가 돌봐드린 사람이었다는 점. 그래서 마음을 기댔던 존재가 사라질 때의 상실과 마음을 쏟았던 존재를 떠나보내는 슬픔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요.


아주 불온한 슬픔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칼이 무뎌질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