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天蓋)

by 김박은경

천개(天蓋)


은회색 빛무리가 손등에 어린다 당신인가 플루메리아 흰꽃이 내려앉는다 당신인가 남중국해의 해가 지며 주홍 얼룩이 번진다 당신인가 산호색 도마뱀붙이가 멈추어 나를 본다 당신인가, 순간마다 기척마다 기울어진다


공항까지 십 분, 택시에서 흐르는 노래는 You are not alone, 정말로 당신인가 내게 남기는 당부인가

그 뺨에 뺨을 얹고 시린 이마에 손을 얹고 안고 영영의 인사하고 하나둘셋 식순대로 당신의 최종이 날아오를 때 여린 바람이 흩어질 때 구멍마다 커다란 입이 되어 빨아들이며 나는 생각한다 이 성체를 단번에 삼킬까요 꼭꼭 씹어서 삼킬까요 침에 녹여가며 천천히 삼킬까요 어떻게 해야 조금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무이네 사구의 모래알보다 곱고 뜨끈하고 습하고 형상의 기억을 따라 다시 뭉치려고 안으려고 품으려고 하네 맛은, 맛은 어떻지 끝까지 졸아들었으니 짜디짜다고 할까 부딪히고 넘어지고 찢어지고 부러지느라 멍투성이 상처투성이 어떻게든 버티느라 울컥 비리다고 할까 화염과 재를 고스란히 통과하였으니 쓰디쓰다고 할까


당신의 붙이들이 모여든다 붙이들은 모여든다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고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주고 그래그래 이해하고 용서하며 돌아오고 더욱 돌아오며 무슨 말을 되풀이한다 그것은 꽃이거나 향이거나 초 같은 것, 속절없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잎사귀와 꽃잎의 가장자리 너머 재 위로 재가 쌓이고 촛농 위로 촛농이 쌓이고 마치 열매처럼 부풀어오르도록 몇 번이고


다들 제 속의 것으로 버틴다 제 속의 다짐 제 속의 믿음 제 속의 기도 너머 제 속의 피와 살과 뼈와 숨으로 하나둘셋 소진하면 끝이 날 텐데


당신이 죽자 나도 죽어버렸고 내가 죽어버려서 당신은 더욱 죽었으니 우리라는 붙이들의 죽음은 줄줄이 이어져 켜켜이 쌓이겠지 이윽고 눈이 없고 귀가 없고 코가 없고 혀가 없고 몸이 없고 생각이 없어서 무슨 현상이랄 것도 없겠지* 누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데 입을 벌렸다 닫았다 어지러운 소란인데 뭐라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순서가 엉킨다 체액이 엉긴다 손끝이 도마뱀처럼 부풀어오른다 아뜩한 시공간쯤에 달라붙었는데 떼는 법을 모르겠다 끝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단정한 얼굴 무심한 얼굴 이상한 얼굴 타인의 얼굴 이토록 편안해 보이는 게 얼마 만인가요 살짝 벌린 입을 향해 귀를 기울인다 당신이 마침내 알아낸 것을 향해 어떻게든 일러주고 싶을 어떤 것을 향해 그러나 모르겠다 끝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희푸른 입술 사이로 구름 조각 같은 것이 모래 더미 같은 것이 솜사탕 같은 것이 아니 마우스피스 같은 것이 담겨 있다 단 한 번의 결전이 남았다는 듯이 결말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눈꺼풀은 미동도 없다


좁고 긴 링 위에는 누군가 던져둔 색색의 꽃송이들 그 위로 당신 위로 천개(天蓋)가 덮힌다, 온통 캄캄하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반야심경 중


(김박은경, <시와반시> 202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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