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고 있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입은 굳어 말을 만들지 못했다. 그 끝자락에서, 죽은 엄마가 생시처럼 곁에 서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전하려 애썼다. 숫자였던 것 같고, 비밀번호였던 것 같고. 손을 뻗으려 버둥대던 나는 다시 살아나 그녀의 말을 들으려 애쓰는 꿈이었다. 새벽 다섯 시, 어둠과 빛이 섞이는 시간. 죽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감각이 선명해진다.
쓰고 싶은데 쓰지 못하는 날들. 거의 다 적어놓고는, 힘없이 지워버리는 날들.
정현채의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를 읽는다.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 소멸이 아니라 옮겨감”이라는 문장. 노인이 먹지 않는 것은 죽기 때문이 아니라, 다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에서는 말년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삼키지 못하던 그날들이 그 문 앞이었을까. 엄마는 드시려고 감은 눈으로 입을 벌리셨는데, 먹어야지, 살아야지 하셨는데 왜 저쪽으로 가셨을까.
백 세까지 살고 떠난 스콧 니어링은 병원이 아닌 자기 집을 원했다. 의학이 삶도, 죽음도 제대로 모르는 듯 보이기에 의사를 곁에 두지 않겠다고 했다. 죽음이 오면 스스로 물과 음식을 끊고, 어떤 약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죽음을 거대한 경험이라 믿었고,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살다 왔으니 기쁨과 희망으로 간다고 했다. 죽음은 이동이며 또 다른 깨어남이라, 모든 새로운 장면 앞에서처럼 환영해야 한다고. 그렇지. 맞다. 의학은 돕지만, 끝내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의학만의 무지가 아니다.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장례식 장면에 대한 글이 오래 남는다. 사람들이 봉투를 열어 한꺼번에 나비를 날려 보낸다. 사라짐이 아닌 변형으로 죽음을 이해한 사람답다. 사라진 자리에 남은 색, 날갯짓, 여운이라니 황홀한 슬픔이었을까. 아버지 뵙고 오던 산에는 거인 같은 석상이 두 분 서계셨는데. 고려 때의 거친 형상이었는데. 가까이서 보고 싶다. 가을 가기 전에 가고 싶다. 오래오래 살아남은 것, 살아남을 것, 영원에 가까운 것들.
스티브 잡스는 마지막 순간, 가족을 천천히 바라보다 먼 곳을 향해 “오, 와우! 오, 와우! 오, 와우!” 하고 감탄을 남겼다. 무엇을 본 걸까. 얼마나 찬란하면, 떠나가는 그 입술에서 감탄이 멈추지 않았을까. 드디어 본 것일까. 드디어 안 것일까. 그게 뭘까.
건축가 정기용은 죽음 몇 달 전 말했다. “늙어갈수록 철학이 필요합니다. 슬퍼하고 회상하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다시 생각하며 성숙해져야 합니다.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맑은 눈빛으로 죽음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죽기 며칠 전, 봄내음을 맡고 싶다며 산으로 나가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 고맙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생각하는 날이다. 그 산, 여름 숲 속에서 강건하게 서 계시던 석상처럼 오래도록 곁에 계셔주시길. 담대하게 이겨내주시길, 이미 그리 하고 계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