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져주는 기계

by 김박은경

오래전 할머니의 방. 펼쳐진 이불 위를 떠도는 머릿기름 냄새, 향수 냄새, 담배 냄새. 얇은 이불 밑의 할머니 다리를 찾아 주무르는 일은 힘들고 지루했다. 조용하니 주무시는 것 같아 손을 놓을까 하면 기침을 하시다가 가래를 뱉으신다며 휴지를 찾으시고, 다시 누우시면 다시 팔도 손도 주무르다가, 아이구 작은 손이 맵구나, 시원해, 이제 그만해라, 하시면 해방이었다. 일어나 앉으시고는 한복 치마를 걷고 속바지에 달린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주셨는데. 그 방에는 커다란 검은 자개장, 장롱 문에는 봉황이며 학 같은 동물들이 날아다녔는데, 온통 거울인 문짝이 할머니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빛이 드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먼지는 반짝거리고 창 너머 골목 쪽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 당신 둘째 아들의 막내가 찾아오는 오후, 쭈뼛쭈뼛 인사하고 다리를 주무르겠다고 작은 손을 옴질거리는 시간. 정말 시원했다기보다는 질긴 고독이 살짝 흩어졌겠지. 나는 할머니를 사랑하여 찾아간 걸까. 할머니 뵙고 다리 주물러드리고 오라는 심부름이었겠지.


얼마 전 안마기를 선물 받았다. 생각보다 더 좋았다. 어깨가 결린다거나 허리가 아프다거나 할 때, 담이 들 때, 피로감이 몰려올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안마기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언제든 무료로 받을 수 있다. 힘들다는 소리도 없고, 일정한 강도와 속도가 유지된다. 거기 말고 조금 옆으로, 그런 소릴 할 필요도 없다. 고맙다 혹은 미안하다 그런 소릴 할 필요도 없다. 사람에게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


좋아서 똑같은 안마기를 선물해 드렸다. 혼자 계시는 그분에게. 산책이며 운동하신 다음에 사용하시라고. 등이 결릴 때 파스를 어떻게 붙이나. 담이 들 때 누가 풀어주나. 다리가 아플 때 누가 주물러주나. 안마기를 즐기시며 쪽잠에 드실 때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가 함께 하는 느낌이겠지. 가까이 또는 멀리 사는 자식들이 찾아온 느낌이겠지. 누가 다리를 주물러준다고 하면 질색을 하시던 분이다. 괜찮다, 그럴 필요 없다며 손길을 거부하시던 분이다. 정말 싫다기보다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갈한 마음이었을 텐데. 안마기는 언제나 젊고 조용하고 마음 같은 게 없으니 미안할 필요가 전혀 없겠지. 그러나 안마기 작동이 멈춘 후 어둑한 실내에서 눈을 뜰 때면 시공의 감각을 잃어버린 시커먼 고독이 숨막히게 덮쳐오겠지.


p.s. 안마는 ‘누를 안(按)’에 ‘문지를 마(摩)’를 쓴다. 두 한자 모두 어루만지다, 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안마기는 어루만져주는 기계가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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