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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Dec 21. 2023

불멸의 흑역사


라이브로 나가는 유튜브 촬영이라고 했다. 못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네,라고 대답했다. 못하는 걸 해보는 게 올해 결심 중 하나였기에. 말은 그랬지만 심장은 24시간 벌렁벌렁.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첫째, 한 시간 반 정도 얘기할 거리 둘째, 말하는 법 익히기 셋째, 코디였다.


무슨 질문을 할지 알 수 없으므로 예상 질문 만들고 연습 시작.  말하는 법은 말할 거리를 25회 정도 연습하라고 했다. (다양한 스피치 책의 결론) 코디는 자연스럽게 하는 걸로. 그런데 덜덜 떨면서 고양이소리 낼 텐데 어쩌지. 덜 떠는 법이 있을까? 청심환? 안정액?


스무 번 정도 연습하니 외워진 듯했지만 여기저기 빼먹고 넘어가는 대목들은 하는 수 없지. 그날이 왔다. 의외로 별로 떨리지 않았지만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약을 사서 칼처럼 주머니에 꽂고 씩씩하게 출발. 촬영 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 원샷.


'제가 오늘 흑역사를 찍으려고 나왔습니다', 하며 시작 그리고 울라불라 끝. 예상치 못한 질문에는 더듬더듬. 진행자는 뭐든 재밌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들어주시고, 나는 화면 속 시공을 초월해 들어주실 미지의 시청자분들을 향해 재미없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고양이소리는 안 냈다. 떨지 않았다. 연습의 힘인지, 약의 힘인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이 쏟아졌다. 약 후유증이라더니 그 말이 맞네…


절판 시집 <중독>이 문학동네에서 8월에 복간되었다. 10월에 라이브방송을 제안해 주셔서 찍었다. 고맙고 고마운 일인데 방송으로 많이 팔렸을지는 잘 모르겠다. 영원한 흑역사라는 점은 알겠다.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러나 흑역사도 역사라는 것. 반복이 능숙함을 낳는다는 것.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발전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배웠다. 그 후의 스피치 기회에서는 약 없이도 떨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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