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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들이 감동이다.. 아빠

아이들

나는 아이들과 살고 있다. 같이 잘 지내다가도 뾰족한 말투로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만들곤 했다. 그런 아이들의 상처를 회복시키겠다고 노력하는 중인 아빠는 반대로 아이들 덕분에 감정의 회복을 ‘당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어리기도 했고, 아빠가 무서워서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꺼내지 못할 때도 많았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있더라도 자신의 감정표현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좀 더 자유로워져서 다행인 것도 있다. 가끔 아빠의 감정을 눈치챌 때가 있는데 그러면 정말 당혹스럽다.




브런치스토리와 얽힌 해프닝 때문에 또 다른 룰을 만들어버린 아빠.



“절대 찾아서 읽지 마라! 아직 이해 못 할 감정들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다급하게 선언한 새로운 룰이다. 나는 브런치 작가로 승인받고 아이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자랑을 했다.

“아빠가 밴드로 8년째 감사노트를 쓰는 거 알지? 매년 아빠 돈으로 칼라풀한 소책자 5권이나 만든 거 봤지? 그건 아빠만 볼 수 있는 책이야. 그런데, 브런치스토리라고 하는 곳은 아빠 글을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어." “오오오, 축하해요.” “아빠가 작가야? ” “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아이들의 축하에 내심 우쭐거리며 나의 ‘필명’을 공개하는 실수를 했다.



대박 실수는 아니지만 그동안 공개한 글 속에 아내와 나 사이의 미묘한 감정, 아이들과 나와의 상처 시간들 그리고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아빠의 속마음이 아이들에게 공개가 돼버렸다. 회복을 위해 상황을 되돌아보며 적고 더 좋은 방법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아이들에게 공개되는 것이 아직은 창피하다.



특히 창피한 이유는 아이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느라 내 폰을 팔아서 아이폰을 사준 과정을 당사자 아이가 읽었다고 했다. 아이는 아빠의 마음과 그 과정을 알게 되어서 아빠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해줬는데 나는 정말 창피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쉽게 해주지 못하는 현실을 손에 쥐고 고민과 한숨으로 보낸 며칠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들켜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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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화를 냈다. 너무너무 창피했다. 뭐든지 해줄 수 있는 아빠가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이 영락없는 ‘허삼관’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런 과정이 아이에게 공개되고 나니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아빠라는 어른으로써 매우 부끄러웠다. ”



그 생각이 맴돌다 보니까 아이들이 악기 배우러 갈 때 차로 태워 주면서 새로운 룰을 거듭 강조했다. “절대로 검색해서 찾아보지 말아라!” “아빠가 브런치 스토리라는 곳에 일상생활 속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과 실수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읽은 진짜 작가분들이 ‘라이킷’을 눌러주면서 격려도 해준다. 그런 격려 덕분에 아빠가 더 노력하고 지속하고 있어. 그런데, 너희들이 이해 못 할 것들이 많아서 아직은 읽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다.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서 “읽지 마라!!!!”라고 또 강조했다.



그렇게 몇 차례 엄포를 놓는데 아이들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이제 아이들이 악기 배우러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알았어요.”라고 말하며 아이들이 차에서 내렸다. 나는 “휴~~” 하면서 거듭 강조했으니 이제는 ‘안 읽겠지.’라며 안도의 한숨을 혼자 쉰 것이다.



차에서 내려서 가려고 하던 아이가 다시 차에 다가오더니 흔들어주는 내 손을 툭 치고 가는 것이다. “알았어요. 그만 걱정해요. 아빠~“라고 손바닥이 전해 주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고 가슴 한구석은 먹먹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아빠가 무쇠강철도 아니고 만능도 아니다. 아빠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얼마나 힘들어하고 전전긍긍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아이들이 커버린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기들 대하듯이 노파심을 가득 담아서 “넘어진다. 조심해라!”를 여전히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훌쩍 커서 “이 정도는 알아서 피해요!” “그 정도는 충분히 알아요.”라고 내게 무언의 표현을 하는 셈이다.






아이가 내 곁으로 온다. 그리고 내 뒤로 간다. 나는 뭘 하려고 그러냐며 짜증을 낸다. 나는 땀이 난 상태이기에 딸들에게 아빠 땀냄새가 느껴지는 게 싫다. 그래서 땀을 흠뻑 흘릴 만큼 걷고 오거나 집안일을 하고 나서 잠시 쉴 때면 딸들이 내 곁에 오는 걸 싫어한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나한테 괜찮다며 달라붙으려고 한다. 또 그럴까 봐 아이에게 짜증을 내며 사과하며 내 곁에 오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


그런데, 아이가 한사코 다가와서 내 뒤를 가는 것이다. 또 목조르기나 업혀서 장난치고 그럴까 봐 “그러지 마라”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순간 막내 아이의 두 손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조물 거리기 시작했다.


“아빠! 시원하죠?”


윽!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땀냄새난다며 다가오지 말라고 짜증을 냈는데 아이는 그런 나를 쉬게 해 주겠다며 내 어깨를 주무르는 것이었다. 내 손의 1/3밖에 안되는데 묘하게 시원하면서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작은 아이 손이 내게 전해주는 티끌 같은 감동이 몸과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음.. 매우 시원하네. 고마워!”


정말 기분 좋다는 표현을 해줬다. 그리고, 그 작은 손이 힘들어서 아플까 봐 그만하라고 이미 시원하고 다 풀렸다고 말했다. 짜증을 내며 다가오지 못하게 했던 내 모습은 한없이 처량했다.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주물러준 작은 아이 손이 승자였다. 그 작은 손의 감동은 내 몸보다 크게 와닿았다. 내 몸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만큼의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정말 뭉클하면서 감사가 샘솟았다.








아이들이 점점 더 커갈수록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로 미안해하는 횟수가 늘어간다.


아이가 원하는 아이폰을 제때 해주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때

아이가 축구클럽을 다니고 싶은데 해주지 못했을 때

아이 셋 모두 피아노를 즐겁게 다니고 있는데 더 이상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두 명을 포기시킬 때

여건이 안 되는데 아이 셋 모두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말할 때



그런 순간들에 직면할 때마다 나는 좌절한다. 예전에는 혼내는 아빠였다면 이제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회유를 해야 하는 아빠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충분히 이해했다고 포기하거나 기다려준다고 말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런데, 아이들이 정말 포기한 것이 아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 떼쓰지 않아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조용히 감동받고 눈물이 핑 돈다.

그 감동들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더 노력하게 한다. 나보다 작고 힘없는 아이들이 내게 주는 ‘감동’ 덕분이다.





아이들과 살기 때문에 나는 살아갈 맛이 난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크고 작은 감동 때문에 또 힘을 내서 일을 한다.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건네주는 풋풋한 사랑 덕분에 변화의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힘든 게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짜슥들. 고맙다. 니들이 나를 키운다. 쩝 “


출처; unsplash의 sabina jaunj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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