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어가다가 아직은 남아 있는 "이발소 삼색등"을 만났습니다. 저는 진짜로 반갑고 고향친구를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자마자 '삼색등'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빌었습니다.
잊히거나 사라지거나 잃어버린 것들을 어쩌다 만나게 될 때 그 느낌도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그것과 함께 저의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 있는 추억을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잊사잃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잣잃 프로젝트도 '깨알 프로젝트'를 꾸준히 하다 보니 한 번 두 번 쓰다가 프로젝트로 분리해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소중한 이유는 시대흐름과 함께 어느 순간 자리를 빼앗기고 사라져 줘야 하는 물건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리고, 각박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투자의 빙하기를 살면서 매년 '전년보다 더 어려운 해'라면서 매 순간 힘들게 지내는 우리에게 '추억'이라는 솜사탕이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의 추억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1. 이발소 삼색등
1. 어릴 때 꼭 가야 하는 곳. 그곳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서 이발소를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깎기 시작했고요. 중, 고등학교 머리가 두발자유화가 아닌 탓에 늘 스포츠머리를 해야 했습니다. 남들 머리 기르고 다니는데 깎고 다니는 것도 싫었지만 더 싫은 것은 이발소였습니다.
수술실 의자 같은 두툼하고 발그레한 의자에 하얀 시트가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발사 할아버지가 오셔서 엉덩이 받침용 판때기를 주시고 올라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얀 시트로 목을 꽉 졸라매면서 이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수동 '이발기'(예전엔 바리깡이라고 했음) 로 머리를 깎기 시작합니다. "째깍째깍'두어 번 밀고 지나가면 '이발기'위로 머리가 흐트러졌습니다. 그러면, 무심히 한번 툭 털어내시고 다시 '째깍째깍'하면서 밀고 또 밀었습니다. 그 느낌이 싫기도 해서 졸다가 순간 눈이 번쩍 뜨입니다. '이발기'에 머리가 찝히게 되면서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발소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이쿠'한마디 하시고 계속 밀고 나갑니다.
머리가 거의 다 밀었을 때, 머리통 모양을 감안해서 깎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부분이 다 똑같은 길이로 동글동글하게 깎아주신 것입니다. 하얀 시트가 졸라매고 있던 목 주변이 따끔거리기 시작합니다. 콧잔등도 머리카락이 쌓여서 간질간질합니다.
투박한 손길로 툭툭 털다가 잘라놓은 머리라인을 따라서 하얀 커 품을 묻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거울 밑 두툼한 가죽에 '쓱쓱'문지르시더니 칼날을 세워서 하얀 커 품자국만 문지르십니다. 정말 등골이 오싹한데 이발사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동글게 자른 스포츠머리의 라인을 마무리하시는데만 집중하십니다.
"윽!"
외마디 비명을 나지막이 지르고 또 정신이 번쩍 듭니다. 목덜미에 무딘 면도날이 쓱하고 그은 것입니다. 또, 이발사 할아버지는 '어이쿠'라고 하시면서 '다음에는 날 좀 세워서 잘라야겠네.' 하십니다. 어릴 때이지만 맘 속에는 '왜 나 다음부터 날을 간다고 하시는 거야.. 아파...'라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습니다.
라인까지 정리가 되고 나면 하얀 시트를 벗기시면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이동해서 머리를 숙이라고 하셨고요. 나무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면 눈에 보이는 것은 파랑, 하양 손가락만 한 타일들의 규칙적인 배열만이 보입니다. 잠시 후, 머리 위로 여름에는 시원한 물이, 겨울에는 뜨끈한 물이 '쏴아'흘러내립니다. 이발사 할아버지는 물뿌리개를 잡고 제 머리 위로 부으시더니 비누로 바로 머리를 문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운동화 빠는 솔이나 대나무 뭉텅이로 머리를 빡빡 문질러 주십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타이밍입니다. 그렇게 문대주시는 손길이 '수동 이발기'로 깎는 손길보다 더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지면서 머리가죽이 벗겨질 만큼 아팠습니다. 머리카락이 거의 없고 짧은 스포츠머리 상태라서 너무 아팠습니다. 어서 나이를 먹어서 이발소를 안 다니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머리감기를 버텼습니다.
머리 감기가 끝나면 물을 틀어주시고 세수를 하라고 하십니다. 아까 아팠던 머리느낌을 생각하면서 냅따 코를 '흥'하고 풀면서 화풀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다시 앉아서 이발소 할아버지의 마감 손길을 기다려야 합니다. 잠시 후, 수건을 들고 오셔서는 두 손으로 잡고 밀가루 가락 뽑듯이 머리에 대고 흔드십니다. 이 때도 얼마나 싫었던지요. 머리에 대고 흔드는 수건의 손길이 거칠어서 얼른 나가고만 싶었습니다. 스포츠머리로 잘린 덕분에 말릴 머리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버지가 계산을 하시고 나면, 말없이 목례를 하고 이발소를 나왔습니다. 그러면 머리에 헬멧을 벗은 듯 휑한 느낌이 들고 괜스레 양쪽 귀 주변으로 바람들이 지나가는 것이 자꾸 느껴져서 서글펐습니다. 그래도 얌전히 머리 잘 깎았다고 지나가다가 설탕 발리고 케첩이 한 줄 뿌려진 핫도그를 하나 손에 쥐는 시간 덕분에 견딜만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는 '이발소 삼색등'이 잊지 못할 추억을 소환하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사회생활 처음하면서 큰 실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부서 팀장님과 선임들과 술을 한잔하고 2차를 가기 위해서 길을 비틀비틀 걷다가 늦은 시간까지 이발소 삼색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 이 시간까지 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머리도 덥수룩한데 자르고 갈까 봅니다."
"어허.. 미쳤구먼. 이 눔. 한잔해서 장난을 하나. 저기는 퇴폐이발소야! 이런..."
"에?"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이발소 삼색등'이 두 개가 붙어서 돌고 있었습니다. 제가 술 취해서 그렇게 보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서야 두 개가 함께 붙어 있는 곳은 예사롭지 않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발소를 '슬램덩크'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매월 만화가 나오는 날이면 거기의 주인공을 닮은 스타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슬램덩크' 송태섭 머리를 해준다는 미용실을 친구들과 다니면서 다시는 이발소를 가지 않았습니다. 스포츠머리인데도 만화주인공처럼 '힙'하게 잘라주면서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잘라주고 샴푸 해주는 미용실이 우리들에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미용실에서 예쁜 누나가 화려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잘라준다고 간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도 좋지만 동글동글한 스포츠머리에서 탈출해서 교복을 입어도 송태섭같이 멋스러운 모습이 자랑스러웠기때문에 '이발소 탈출'이 매우 행복했었습니다.
더 이상 이발소를 가지 않으면서 강백호 같은 동글동글한 스포츠머리에서 송태섭 같은 뭔가 힙한 스포츠머리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찐 이발소'가 서서히 자리를 비켜주고 있는 것을 느끼니까 이런 추억이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길에 가다가 본 '이발소 삼색등'이 매우 반가웠던 것입니다.
아! 시대의 흐름을 탔구나.
그런데, 그런데..
길을 걷다가 나름대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동 이발기'가 '전동 이발기'로 자리바꿈 해서 한결 더 부드럽게 깎아주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런 것과 같이 환호성을 지른 이유는 '이발소 삼색등'이 현대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서 달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짜잔~~
공개합니다.
2. 전자 이발소 삼색등
제가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저만 그런 감성을 느끼고 길에 서서 두 손을 들고 환호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만의 감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대가 흘러서 이발소가 사라져 가는 시점에 '전자식 이발소 삼색등'이 달려 있다는 것은 최고였습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추억과 감성을 살려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레트로 물건들도 반갑습니다.
오늘은 길을 걸으면서 '이발소 삼색등'을 만나서 반가웠던 느낌과 '전자 이발소 삼색등'을 만나서 즐거웠던 느낌을 나누어보았습니다.
부록처럼 하나 더 나누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제 학창 시절에 패션 스포츠머리 시대를 열어준 '미용실'을 추억해보게 해 준 간판을 올립니다. 이 간판은 지극히 정직하면서 저에게 패션에 눈을 뜨게 해 준 공간입니다. 지나가다 만난 '미용실 간판'이 심플하고 정직해서 추억이 방울방울 샘솟아서 좋았습니다.
'이발소 삼색등'을 길에서 본 순간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엄청 즐거웠습니다. 저처럼 잠시라도 추억이 스멀스멀 돋아났다면 저는 성공입니다. 저의 추억을 나누어드렸더니 읽으시는 분들의 더 행복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웃음꽃이 피고 잠시라도 옛 감성이 잠시 안개처럼 우리를 휘감았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에서 보는 것들이 '재미'와 '감동'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추억'도 소환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