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다 그렇지 뭐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약 900km의 여정으로 약 30~40일 동안 오로지 두발로 프랑스 남부인 생장부터 피레네 산맥을 통해 스페인 서북부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걷는 길이다. 산티아고 도착 후에도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라'와 '묵시아'라는 마을까지 약 60km를 더 걷기도 한다. 까미노를 걷게 되면 필그림(Philgrim) 패스포트를 가지고 각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순례자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에 묵을 수 있다. 알베르게에는 순례길을 걸으러 온 세계 각지의 순례자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 서로의 음식과 와인을 나눠 먹고 기타를 튕기며 파티를 연다. 순례길을 걸으며 앞서니 뒷서니 만나는 모든 순례자들은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말을 던진다. 하루 약 8시간~10시간 정도를 걷는데 이게 또 보통 일이 아니다. 처음엔 자신만만했던 나도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땐 내게 이 길을 추천한 친구를 죽^^이고 싶었다. 청바지니 아이패드니 하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모두 들어있는 배낭을 짊어지고 하루 27km 내지는 30km를 걷는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대체 내가 왜 이 길을 걸으러 온 건지 후회막심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걷다 보면 이 길이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단순 몇 번 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이 있다. 어느새 돌아보면 나는 이 길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까미노의 모든 기억과 경험을 전부 적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지니 엑기스만 뽑아보도록 하자.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내게 까미노에서 제일 힘든 구간은 첫날이었다. 산을 즐겨 타지 않는 한 인간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걸쳐있는 높다란 산맥을 하나 넘다 보니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보고 여기 좋다고 한 @#@##$ 누구야,, 당장 나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할 때는 어느 정도 각 잡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산을 올랐으니 그나마 정신적으론 버틸만했다. 하지만 순례길은 분명 평평한 평지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만 믿고 온 건데 첫날부터 오질라게 올라가는 오르막이 원망스러웠다. 언제까지야? 언제 다와? 걸음을 같이 하는 다른 순례자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냐고오오를 외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왔다. 내리막 길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첫날의 도착지는 '론 세스 바이어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나무에 적힌 숙소 표지판의 이름을 본 순간 유레카를 외쳤다.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꼈달까. 발엔 온통 물집이 다 잡히고 몸의 근육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똑바로 걷지를 못했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숙소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데 어찌나 감사하던지. 어그적 어그적 걸으며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이곳이 바로 천국 아니던가. 그렇게 나의 까미노는 시작되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온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에 알이 지독하게 배겨있었다. 숙소에 묵었던 모든 순레자들의 걸음걸이가 똥 싼 기저귀라도 찬 듯 다 똑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똑바로 좀 걸으라고. 너나 똑바로 걸어. 하하하.
첫날 그렇게 개고생을 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음 날부터는 난이도가 많이 수월해졌다. 피레네 같은 산맥을 올라가는 날은 많지 않았다. 적당히 오르고 적당히 내려갔다. 평지도 꽤 많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건 걸으며 만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른 여행지에서도 여행자들과 만나 노는 것이 재밌었지만 이곳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고통을 느끼며, 같은 길을 걸으니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 같이 걷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던 아일랜드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있었다. 밤새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이들이었기에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일정을 늦출 순 없기에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팜플로나라는 대도시의 밤거리를 산책하던 중 그 선생님들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는데 길거리에서 오만 소리를 지르고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어디 갔었냐며, 걱정했다며, 잘 걷고 있냐며 등등등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그 선선한 밤공기, 그 순간의 색감,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형형한 아드레날린, 기쁨을 주체할 수 없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우리의 순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삶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것". 여행을 하며 커다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 어느 공간은 아주 잘 그린 그림들로 꾸며져 있다. 어느 공간은 물통을 엎어 그림이 완전히 망가졌다. 잘 그린 그림이든, 망가진 그림이든 나는 여행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때로는 검은색, 황토색, 회색. 이 모든 색감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내 삶의 궤적이다. 시간이 지나 그림들을 꺼내 볼 때면 달달한 초콜릿이 입 안에 녹아들듯 이미 그 기억 안에 푹 녹아들어 간 내가 있다.
우리는 한참을 거리 한복판에 서서 큰 소리로 웃으며 떠들어댔다. 실컷 떠들다가 이제 뭘 할 거냐는 말에 선생님들은 클럽에 간다고 했다. 조인 어스! 라며 내 팔짱을 낀다. 60대 노부부 선생님도 계셨는데 같이 클럽을 갔다. 나이는 중요치 않다! 노부부께서는 춤을 정말로 잘 추셨고 커플 댄스를 추며 젊은이들의 환호를 받았다. 나는 진지충이기 때문에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도 다른 선생님들과 순례길을 걸으며 느낀 점들에 대한 열렬한 대화를 나누었다. 시끌벅적한 밤은 지나가고, 내일이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페이스대로 길을 걷는다.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도,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여행은 그런 것이고, 삶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 차가운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