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우중 까미노

인생이 다 그렇지 뭐

by 조르바


비가 몇 시간째 내렸다. 우중 트레킹이 됐다. 온몸은 다 젖었고 가방 안에 있던 물건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입고 있던 우비로 가방을 덮었다. 싸구려 우비인 탓인지 가방이 다 덮이진 않는다. 오늘은 오르막이 많은 날이다. 옷 속은 땀으로 뒤범벅됐고 옷 밖은 빗물로 다 젖게 됐다. 미용실을 몇 달째 가지 못해 치렁치렁하게 길어버린 머리칼에서 떨어진 빗물은 그대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만큼 많은 물이 얼굴을 뒤엎었다. 혀를 한번 날름 거리면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오르막을 오를 때마다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끝없이 오르던 언덕이 끝나서야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길을 찰박찰박 걸어갔다.


빗물을 툭툭 털어내고 도착한 알베르게 문을 열었다. 끼익- 고즈넉한 분위기의 통나무집이었다. 한쪽 구석의 화로에서는 자그작 자그작 나무가 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저녁 장을 봐오겠다며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곧바로 샤워실로 들어가 거칠게 젖은 몸을 뜨거운 물로 헹궈냈다. 샤워를 끝내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오니 헝가리의 고등학생 10여 명이 숙소 프런트를 차지하고 있다. 체크인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숙박 주인이 자리를 비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체크인을 할 때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프런트 앞에 쭈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한국은 어떤 나라야? 어디에 있는 나라야?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위험한 곳 아니야? 나는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들도 내게 헝가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학여행을 까미노로 온 그들은 고작 18살에 불과했지만 이미 주변 여러 국가들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여행한 경험이 있었다. 새로운 국가와 문화, 자신과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사람, 그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고등학생이면 입시를 준비하느라 2주라는 시간을 빼기가 무척 힘든데, 이런 길을 친구들, 선생님과 함께 걸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했다. 이 아이들 또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과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아니어도 뭐 어때?'라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있었다. 부모님도, 자신이 속한 환경의 사람들도 그들에게 무조건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며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응원해주시는 부모님, 원하는 삶을 살라고 믿어주시는 부모님이라고 했다. 일반화는 금물이겠지만, 많은 부분 한국과 차이가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네팔과 캐나다의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 길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을 해주었다. 썩키라는 친구는 내게, "우리 할아버지는 86살인데 먹고 자고 일어나 술 마시는 것 밖엔 스토리가 없어. 그래서 매번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똑같지. 근데 너는 24살인데 벌써 엄청난 스토리들이 있네. 나도 너처럼 살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스토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 고통이 있었는데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니.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인생이 재미는 있고, 한번 입을 털기 시작하면 술술 이야깃거리들이 나온다고 했다. 군대 가서 입담으로 선/후임/간부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도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잘 풀어갈 수 있다고 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스페인의 한 외딴 통나무집에서 만나 내 썰을 술술 풀고, 너네들이 관심을 갖고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한참을 이야기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각국의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테이블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경청했다. 폴란드에서 온 여자였다. 한 소절이 끝나고 자신의 약혼자에게 바치는 곡이라며 노래를 다시 이어간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눈을 따듯하게 바라본다. 여자의 눈빛에서, 목소리에서 약혼자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절절히 느껴진다. (부럽지 않았다. 응?)


노래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나는 영화 피치 퍼펙트(Pitch perfect)에서 나오는 컵 송을 아리랑과 접목시켜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고 헝가리 친구들이 자신들의 동요를 불렀고, 한국에서 온 예일 누나는 전통적 아리랑을 불렀다. 우리 앞에는 맛있는 음식들과 레드 와인이 놓여 있었고, 은은한 촛불이 관객들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자그작 자그작 타오르는 화롯불은 집 안을 온기로 가득하게 해 주었고, 밖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우리의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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