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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Sep 15. 2020

#42. 한 걸음, 한 걸음

인생이 다 그렇지 뭐


 토요일 아침, 혼자 기획했던 첫 외부진료였던 만큼 마음도 많이 분주했고 들뜨기도 했었다. 일에 차질이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 전날 늦게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하나하나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다시 확인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모든 프로세스를 확인하고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려봤지만 하나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이곳은 아프리카라는 걸. 떠날 준비를 다하고 나서 같이 가기로 한 동료 의사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리 살균해놓은 기구를 챙겨 오기로 한 친구였다. 신호음이 계속 울리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전화를 끊고 다른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역과 어씨스트를 맡은 친구였다. 그 친구 또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준비하느라 바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10분을 기다린 후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10분 후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둘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출발을 해야 하는데 문자가 하나 왔다. 


"조르바, 오늘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


치과 기구들을 챙겨 오기로 했던 친구였다. 하...... 문자에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 미리 말을 해준 것도 아니고, 출발해야 하는 시간에 문자를 달랑 한 개 보낸 것이다. 


"왜? 무슨 일인데?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준비 다 해놨는데. 너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잖아. 어떡할 거야?"


답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문자조차 없었다. 아예 잠수를 타버렸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너무 화가 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멘붕에 빠졌다. 계획이 틀어졌고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몰랐다. 살균된 기구를 찾으러 가려면 1시간을 차 타고 가야 하고, 마을까지 가려면 또 다른 1시간이 필요하다. 통역을 해줄 사람과 어시스트 또한 필요했다. 혼자서는 이 일을 감당하기에 벅찼다. 더군다나 첫 외부진료였기 때문에 혹여나 생길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 또한 있었다. 


멘붕이었다. 말 그대로 멘붕. 준비해놓은 음식들이며 예약해놓은 택시, 살균해놓은 기구들, 기다리고 있을 마을 사람들, 학교 선생님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이 프로젝트 하나 준비하는 데 들어간 돈 또한 무시할 순 없었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전체를 두고 갑자기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말라위 사람들의 거짓말을 잊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느낀 것 중 하나가 거짓말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약속은 약속이 아니며, 자기가 내뱉은 말은 자기가 한 말이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언제든 무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외국인에게 특히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라위에 거주하는 한인 분들에게 들어보면 그놈의 거짓말 때문에 복장이 터진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과 같이 무언가를 한다니. 돈을 줘도 속이는 판에 돈을 준 것도 아니고, 밥 한 번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나? 나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진행을 했지. 하기 싫으면 안 한다고 하면 됐잖아. 그럼 다른 사람을 구하지. 왜 한다고 했다가 당일날 취소를 하는 거야 대체.


이들을 그대로 믿은 내가 멍청했고 순진했다. 이번 외부진료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준비한 게 너무나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우선 필요한 사람은 같이 진료를 봐줄 의사 한 명과 의사가 아니더라도 통역과 어씨스트를 해줄 수 있는 로컬 친구 한 명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동료 의사들과 로컬 친구들 에게 전화를 돌리고 사정을 설명했다. 친하든 안 친하든 상관없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두 명이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한 명은 구강악안면외과 시니어 치의였고, 한 명은 교회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전화를 돌리고 있는데 Ngo단체에서 일을 하던 한국인 친구들도 같이 가서 페이스 페인팅이라도 하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웰컴이었다. 학교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다행히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아 가능할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빠르게 달려 살균된 기구를 가지고 마을로 향했다. 두 명의 친구는 나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있었고, 내가 기구만 가지고 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맞춰 놓았다. 자발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페이스 페인팅을 하는 Ngo 친구들은 따로 코너를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했다. 

가지고 온 도구들을 풀어놓고 환자를 봤다. 수복치료나 근관치료는 장비가 없기에 하지 못했고 보통 발치 환자들 위주로 봤다. 약 3시간가량 진료를 했고 쓰레기 마을에 사는 사람들 뿐 아닌 동네 사람들도 다녀갔다. 미리 리스트에 넣어 놓은 사람들은 이가 너무 좋지 않아 어디를 어떻게 먼저 손을 봐줘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어떤 치아는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치아인데, 그러려면 병원에 와야 했다. 병원에 오려면 교통비가 들고, 진료비가 든다. 많이 들진 않지만 그 비용을 이들이 쉽게 감당할 순 없었다. 한 명을 데려가면 그다음 환자가 있다. 이 환자는 데려갔는데 그다음 환자를 데려가지 않는 건 공평하지 않다고 느낄 것 같았다. 내가 내줄 수 있는 비용엔 한계가 있었다. 데려가려면 모두를 데려가 진료를 봐줘야 했다. 안타깝지만 국립병원은 무료가 아니었고, 자선단체가 아니었다.

 




이들 중 평생 치과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손에 꼽았다. 고통이 생기면 그 고통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다. 얼얼하고, 시리고, 쑤시고, 끊어질 것 같은 치통과 함께 평생을 살았다. 그 과정 중에 더 큰 병을 얻은 사람들도 있고, 그 병으로 죽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런 그들을 보고 병원에 가야 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 갈 돈으로 하루의 식량을 사 먹는 게 더 나았다.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사치 중의 사치였다. 


진료를 받은 사람 중 하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이 어딘가에서 주워 온 깨끗한 사탕수수를 내어주었다. 어떻게 먹는지 알 길 없는 사탕수수를 받아 들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고마움이 잔뜩 담긴 사탕수수는 내가 살면서 받아 본 선물 중 가장 따듯한 선물이었다. 진료가 모두 끝나고 일을 마무리지었다. 갑자기 부탁을 했음에도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친구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느낀 것이 더 많다며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어 고맙다고 했다. 


한 가지 씁쓸했던 건 이들의 삶 자체가 이 진료를 통해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한 번, 두 번, 열 번 찾아와 진료를 한다 한들, 이들 내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들의 삶은 몇 년이고 그대로일 것이다.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그들의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모티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삶 자체에 희망이 없었다.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없고, 이렇게 태어나고 살았으니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패배의식이 그들 안에 가득했다. 그 패배의식을 탓할 순 없다. 그들이 태어나고 싶어 이 땅과 그 마을에 태어난 건 아닐 테니. 내가 그들에게 하는 말 하나하나가 특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오만함으로 비칠 수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고민이 더욱 깊어졌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 나가 보기로 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기로. 그러다 보면 길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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