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는 들을 뿐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이라는 단어는 항상 내 주변을 맴돌았다.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 창의적인 아이디어. 어렸을 때에는 '창의'라는 단어가 굉장히 커다랗고 막연한 것으로 느껴졌다. 창의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창의적인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정작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도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사고를 하고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두리뭉실한 안개로 가득했던 유년시절을 지나 '학업'이라는 현실이 득실거리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니, 나를 에워싸고 있던 이 안개같이 희미하고 꿈처럼 아련한 형용사들은 금세 사라졌다. 내가 나의 사춘기를 조금 더 방황하고 고민하며 치열하게 보냈더라면, 그 온갖 철학적이고 모호한 단어들을 훈장처럼 내 몸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있었을 것이다. 정답을 찾지는 못했더라도 내 몸과 마음에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남겨놓을 수 있었겠지만, 그 시절 나는 그런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푸는 것보다 정답이 딱딱 정해져 있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 시절 수많은 질문으로도 풀 수 없는 내 인생과 모호한 안개에 관한 문제들은 내 적성에 잘 맞지 않았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가늠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모호한 것은 그 흐릿함을 지우고 또렷하게 만들어 놓거나, 그게 되지 않으면 그 모호한 것을 내 눈 앞에서 치워버렸다. 이러한 성격이 정이 없고 딱딱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간혹 이런 성격과 사고가 친구들 사이에서도 문제를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그 원인을 파악하고 모호한 것들을 하나씩 뚜렷하게 만들거나 치워 가다 보면 본질이 쉽게 드러났다. 문제의 핵심만 남겨놓고 나면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쉬웠고, 그렇게 다툼을 해결하거나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경우도 더러 생겼다. 그러다 보니, 간혹 고민이 있거나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나 스스로도 점점 이런 부분이 내가 가진 장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의 이런 사고방식은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어떠한 정보를 전달받을 때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정말인지 확인해서 흐릿한 그 어떤 것도 내 주변에 남기지 않으려 했다. 대화 중간중간 사실 확인을 위해서 검색을 하고, 질문을 쏟아붓고, 근거를 요구하는 대화는 누구에게나 쉬운 대화가 아닐 것이다. 감정적인 대화를 들을 때마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것을 나도 모르게 강요하고 있었다. 쉽게 누군가의 대화에 공감하지 못하고, 하소연에 등을 토닥여주지 못했다.
"맨날 뭔 증거를 내노라 항께, 니랑은 대화를 못하것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자주 하시는 말이다. 이전에도 사실관계 파악을 잘하지 않고, 온갖 뉴스들을 근거로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에게 누가 그러더냐,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냐, 진짜인지는 확인해 보셨냐 질문을 해 대니 참다 참다못해 성토하신 것이다. 이런 대화는 내 몸이 아프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내 몸을 조금 더 잘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까지 하려는 나에게, 어머니의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뉴스 실어 나르기는 신발에 들어있는 모래 알갱이처럼 딱히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신경 쓰여 빼 버리고 싶은 그 무엇이었다. 나는 어머니께서 조금 더 확실한 근거로 이야기하기를 바랐지만, 어머니는 웬만하면 근거가 필요로 할 것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셨다.
회사에서도 이런 사고 성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주어진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아주 적합한 사고방식이었다. 핵심에 빠르게 도달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는 이러한 사고방식과 대화만 한 것이 없었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주변 동료들로부터도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조금 까탈스럽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러나, 나의 이런 사고방식은 문제 해결이 필요하지 않은 어떠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방법론은 찾아가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아이디어들이 넘쳐야 하는 대화에 건건이 증거를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게 되니 나의 어머니처럼 대화를 지속하지 않으려는 동료들이 늘었다. 내가 말단으로 주어진 일만 하며 의견을 개진하고 있을 때에는 잘 알지 못했는데, 어떠한 의견을 받아가며 그룹을 리딩 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나니 명확하게 단점이 되어버렸다. 창의적인 의견에 근거라는 무거운 꼬리표를 달아놓고 끌어가려고 하니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좌절을 먼저 맛보아야 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근거를 가지고 오라니. 아무도 해 보지 않은 길을 가 보자고 하면서 그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을 해 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황당한 요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나의 어머니처럼 대화를 끊어갔다.
"의견을 내면 좀 된다고도 해 주고, 힘을 줘야 더 의견을 내지. 지금 같아서는 어차피 안될 의견 내보고 싶지도 않아요."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용기 있게도 그리고 운이 좋게도 저런 의견을 이야기해 줄 만한 후배가 내 곁에는 있었다.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단계에서 그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거, 지난번에도 해 봐서 아는데 안되더라고."
그들의 창의를 막는 단 한마디의,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그리고 누구나 하고 있는 나의 반응. 아무런 생각 없이 나의 경험을 전달해서 아이디어가 더 구체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은 나의 성토가 그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아이디어를 무참하게 산산조각 내 버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안될 거 의견 내서 뭐해요.
이후로 나는 회사에서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할 때에는 나를 조금 참아보기로 했다. 그들이 끝까지 이야기해 보게 만들고, 그 일을 구체화하도록 두었다. 확실한 것만 고집하는 나의 성격에 이런 것들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일들이 대체로 성공한다거나 실제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경우도 많지 않다. 결국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단계에서 현실의 벽에 막히거나, 그 벽을 허물다 지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런 방식이 시간 낭비라고 했다. 누가 봐도 안될 것 같은 아이디어를 왜 실행까지 해 보게 하느냐.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빨리 해결해 놓고 우선순위를 빨리빨리 정해주는 것이 상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냐. 답답하다. 이런 의견을 주는 사람들은 예전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길을 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이라면, 적어도 그 샘을 내가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정말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실현해 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비율로 보자면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이 한 번의 성공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엄청났다. 실패할 것 같았던 아이디어를 성공적으로 실현해 내는 것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한 명의 성공이었지만, 모두의 성공이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개진하는 단계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사라져 갔다.
이제 나는 회사에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 나의 불편함은 뒤로 숨겨놓고 많은 이야기들을 듣는다. 내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작은 이야기 하나에서 어떠한 아이디어가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고 같이 들여다보면 또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그냥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고, 좋은 의견이라는 피드백을 주고 있을 뿐이다. 어느 한 마디도 자르지 않고 듣는다.
10년 동안 하던 개발업무를 뒤로 하고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기획으로 업무를 변경하게 되면서 이런 대화와 사고, 믿음은 내 큰 자산이 되었다.
"아이디어가 참 많으신 것 같아요."
후배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내 아이디어는 다 내 것이 아니다. 모두 그들의 아이디어이다. 나는 단지 그것들을 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