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응답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 이 글은, 교회에서 QTBasic 이라는 과정을 하면서 큐티 실제에 대한 숙제를 하면서 묵상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매일 하는 묵상보다 좀 더 확장을 한 결과물이 나왔는데요, 묵상으로 글쓰기를 하는 하나의 표본이 될 것 같아서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 묵상 본문: 출애굽기 4:18-23
여호와께서 미디안에 있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너를 죽이려고 하던 자들이 다 죽었다." (출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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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절이 희한하게 다가왔다. 3장부터 4:17까지 멋지게, 표적과 함께 모세를 설득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났을까, 하나님께 호되게 말씀을 듣고는 미디안 장인의 집으로 와서 장인에게 ‘이제 가애겠습니다.’ 한다. 그리고 19절 - 다시 하나님 말씀이 나온다. ‘가라. 너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죽었다.’ 순서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3장부터 다시 읽었다.
사명을 주실 때 크게 주신다. 나도 버겁다. 온 세상을 바꿔라 하시는 것 같다. 당연히 나의 반응은, 내가요? 이다. 그래서 그런지 19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주어지는 것은 사명에 딸린 일종의 정보다. Information. 아주 중요한 정보. 만약에 모세에게 이 정보부터 주었다면? 모세는 아마도 40년 전 과거로 바로 회기 했을 것이다. 40년 전 이집트 사람을 죽인 다음에 했어야 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보를 사명과 부르심 다음에, 그리고 모세의 믿음의 반응 행동 - 저 이제 갈게요 - 다음에 주신다. 참, 하나님도.
원대한 계획과 말씀과 사명으로 가정을 이루고 판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여기 양지에 왔다. 모든 과정 과정에 실수도 많았지만 분명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이 있었다. 아, 알겠는데 감사한데 저 그거 잘 못해요 하는 내 마음 한켠이 보였다. 그거 내일 또 언제가 할게요 하는 마음도 있었다. 오늘 모세처럼 ‘저 이제 할게요.’ 하는 반응을 해야겠다. 우리 예배하고 기도해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거 하러 가야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모든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으니 너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바로 앞에서 그 기적들을 다 보이도록 하여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할 것이니 그가 백성들을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출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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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 새벽기도 말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백성을 보내주지 않는 것을 어렵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해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이 다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은데 하는 마음으로 나도 한번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에게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하니까.
첫 번째로 어렵지 않았던 것은, 악도 하나님이 하락해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욥에게 그렇게 허락하셨다. 왜? 하나님이 악해? 이런 문제가 아니다. 이런 구도는 하나님을 악의 반대 선한 존재로만 보는 건데 이건 반은 맞겠지만 반 이상은 틀렸다. 하나님은 악에 대응되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 표현이 부족하다 - 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또 뱀이 있었다. 신학적으로는 모르지만 성경은 그렇다. 아무튼 하나님은 모든 선과 악 위에 계신 분이기에 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하시는 것은 당연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믿음이 왔다.
두 번째는, 마치 이스라엘을 위한 채찍으로 바벨론을 택하신 것 같이 바로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벨론도 심판받았다. 바로도 마찬가지다. 바로의 심판을 위해 이렇게 하신 것이다. 바로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았다. 강제 노역 등 그 선대 왕의 약속을 저 버렸다. 생명을 구한 약속이었는데 말이다.
세 번째는, 22절을 위해 21절 완악함이 있다는 생각이 오늘 묵상하며 추가로 들었다. 22절이 마치 ‘자랑질’ 하는 덕후 같다는 생각 들었다. 하나님이 이 백성들이 자기 아들 딸, 그것도 첫째로 귀한 - 여기서 예수님 생각이 나 울컥했다 - 장자라는 것을 ‘자랑’ 하고 싶으셨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하고 오는 자손들에게뿐 아니라 오늘 나와 같은 떠중이 믿음의 자손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으셨단 것이다. 그래서 바로를 악역 시키신 것이다. 연극 연출을 해야 하는데 모두가 착한 사람만 한다면 그 연극이 되겠는가 말이다. 악역이 필요했고 그는 실제 악했다. 그러니 악하게 하신 것이 연출가 하나님 맞다.
그리고 23절에서 하이라이트 복음의 메시지가 나온다. 사실 이걸 위해 바로를 사용하신 것이다. 여기에 어떤 설명을 더하겠는가. 예수님이 예표 되지 않았는가. 심봤다. 예수님이 그러셨고 성령을 붙들고 살았던 우리 믿음의 보상, 선배들에 이렇게 거절당하지 않았나. 지금 복음으로 살 때 거절당하지 않나. 코로나가 이렇게 거절하지 않나. 이는 내 장자 예수를 주는 이유다! 이걸 이해시키시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 그리고 그 거절당하는 자손들이 된 거고 바로가 이걸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했는데 바로가 알아서 했다고 하면 그게 다 이상하지, 하나님이 이 복음의 메시지를 위해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게 맞지 않을까 한다.
오늘 아이들과 아침 그 시간이 없는 등교 시간에 큐티 나눔을 하면서 - 아이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장자 되게 해주 시는 분이라고, 장자가 되게 해 주세요 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좋은지, 거기서도 사실 감동이 왔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응, 너희들은 이미 하나님의 장자야.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장자 아들 딸이야, 그러니 저 바로 같은 세상에서 당당하렴-‘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선연히 드러나게 하시려고 세상이 있다. 때론 힘들게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락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처럼 사랑하시기를 알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 마음으로 살게 된다. 예수님처럼. 오늘도 악역을 하나 만나야 하는데 사랑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