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의 『희망의 배신』을 읽고
책의 4분의 3쯤 읽다, 남은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본 뒤 생각했습니다.
"이쯤에서 그만 읽어도 되겠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또다른 저서에서 보여줬던 미국 저임금 노동 현장의 거침없는 르포는
꽤 강력했고 제가 노동과 인간의 존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성찰의 여지를 갖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받은 느낌은 '아, 뭔가 좀 이상하다. 아 또 미국 어질하다' 였습니다.
경력직 화이트칼라의 구직기.
미국 이야기지만, 지난 저임금 노동 현장 이야기 보다 조금은 거리감을 좁히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런데 초반부터 세계관 충돌이 너무 컸습니다.
이 책은 실직한 미국 경력직 화이트칼라가 구직기간에 자기돈 수백 달러를 들여 커리어 코칭(이력서 작성, 이미지 메이킹, 생활 루틴 관리까지)을 받고, 실업자 네트워킹 행사에 다니며, 지역 구직 세미나를 전전하는 현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면접은 거의 잡히지 않거나, 잡혀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기업.
제 세계관 충돌의 지점은, 이게 ‘경력직’의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경.력.직.
경력직이라면, 십수년간의 실무 경험과 커리어, 노하우,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본인이 일하던 업계의 흐름도 꿰뚫고 있을 사람들 아닌가요?
그 분야에 대한 자신감도 어느 정도는 기본값일 테고요.
저 역시 수년간 닦아온 커리어 여정 중, 올해가 가장 무거운 시기이지만
“이 회사 아니면 어디 가나…” 같은 두려움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 아니어도 내가 갈 수 있는 곳 많다”는 자신감이 저를 버티게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 고비는 지금 커리어 시점에서 극복해야 할 과업이다’ 라는 마음으로 근근이 버티는 중이지만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경력직들이 구직 시장에서 고전하고,
그 불안감을 활용해 돈을 빨아들이는 커리어 코칭, 세미나, 네트워킹 산업이 성행한다니…
미국 = 자본주의 = 능력 우선주의 = 경력직이 우대받는 곳 , 이건 또 미국에 대한 나만의 틀린 도식이었나?
내가 알던 고리타분한 미국의 이미지에 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돼서 챗GPT에 물었더니,
"그냥 미국 고용시장이 원래 그렇다"고 하더군요.
어이없어서 여러 정보를 찾아봤습니다.
그 결과 아… "미국, 또 다른 세계여...."
정말 그 말밖에 안 나옵니다.
(찾아본 바는 이해했지만,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풀진 않겠습니다.
다만 그 구조를 알고 나니, 그들의 현실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책은 결국 그 여정의 반복입니다.
저자는 지어낸 이력으로, 뻘소리 가득한 커리어 코칭,
가짜 네트워킹 행사, 교회 부흥회 같은 지역 구직 세미나를 전전하며 구직의 기회를 찾아 애씁니다.
읽다 보니 문득 궁금했습니다.
"아니 진짜 이게 현실이 맞다고?"
"작가가 진짜 구직할 의지는 없이 그냥 이런 현장을 취재하려는 게 목적 아니었을까?”
그래서 또다시 챗GPT에 물어봤습니다.
예상과 달리, 미국의 독자들은 “이토록 현실적일 수 없다”는 리뷰 일색입니다.
아… 어질어질한 아메리카여.
그렇게 책을 덮었습니다.
(물론 저자의 글은 충분히 가치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이 지리멸렬한 구직 여정을 따라가기엔 진이 빠졌을 뿐입니다.)
어렸을 땐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도 "아 그렇구나, 특이하네" 하고 스쳐 지나갔던
그들의 문화가 요즘은 세세하게 눈에 걸립니다.
작년의 반은 인도에 빠져 인도의 철학과 역사, 정치와 현실을 따라가며
감탄하고, 놀라고, 때로는 탄식했습니다.
올해는 우연한 계기로 시선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자본주의, 공동체, 중산층, 노동.
낯설고도 흥미로운 풍경들입니다. 동시에 교과과정으로 배운 지식체계는 와르르 무너집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그리고 내 삶이 너무 뻔해 보여
"왜 살아야 하지? 다 보이는 것 같은데…"
하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뭐가 이렇게 다르고, 흥미롭고, 쇼킹한 것이 많은지.
그러다가도 그 다양함 사이에서
어딘가 연결된 듯한 오묘함을 느낄 때면,
참, 살아간다는 게…괴로웠다가 평온했다가 뻔했다가 흥미진진했다가..
헛웃음이 나올 만큼 복잡하고도 아름답... 아니 그냥 복잡한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