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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Sep 17. 2023

[도성한담]  미국의 황제폐하!

실제로 존재했던 19세기 황제 노턴 1세

제국주의 영국왕실에 대항해 피로 얻어 낸 자유의 나라, 미국.  민주주의의 성지로 자처하는 미국땅에 황제가 있다고?  ‘있었다고?’  그럼 그렇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허지만 사실입니다.  이 미국에 황제임을 선언하고, 황제로 처신하고, 주위사람들이 황제로 모셨던 황제(Emperor)가 있었습니다.  샌 프란시스코에 존재했던 미국의 황제얘기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를 침략하자 자신이 ‘멕시코의 보호자’라고 자칭했던 황제이기도 합니다.  황제얘기로 가는 길목에 잠시 미국의 초창기 역사를 돌아봅니다.


영국의 식민지 국가로서 영국 왕의 명령에 따라 다스려졌던 미국.  1580년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영국인들은 버지니아에 식민정부를 세우고 인디언과 다투기도 하고 오손도손 지내기도 하면서 그들만의 새 터전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대부분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이주한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자치적인 삶과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점점 규모가 커지고 정부체계를 갖추면서 영국 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북미주에 식민지를 형성한 영국과 프랑스는 견원지간으로 항시 싸움의 역사를 만들어 갔고, 양국 간의 국제전인 ‘7년 전쟁’ (1756-1763)을 치르면서 영국은 나폴레옹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많은 부채를 감당할 자금이 필요했지요.  영국왕 죠지 3세는 신대륙 식민지 13개 주를 향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미선]  선생님!  그럼 영국왕은 북미 식민지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세금을 거두지 않았나요?

[해월]  영국 입장에서 보면 북미보다 인디아 쪽이 훨씬 일찍부터 경제적 실리가 더 많았던 거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1600년에 설립된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에 인디아와의 교역을 승인하고 당시 인디아를 통치하던 무갈(Mughal) 제국의 아크바 대제 (Emperor Akbar the Great)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면서 양국 간 교류를 시작했어.  인디아의 경제력은 1707년에 세계 GDP의 25%를 차지할 만큼 거대했었지.  영국의 식민지 시대를 졸업한 1947년에 와서는 4%로 줄었지만.


[미선]  인디아의 경제력이 대단했었네요.

[해월]  1492년의 콜럼버스를 위시해 1519년의 마젤란 (Ferdinand Magellan)의  탐험항해도 결국 유럽과 인디아 간 교역로를 마련하고자 함이었으니 인디아의 경제적 위상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다고 봐야 해. 그런 인디아에 교역로를 뚫은 영국은 3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다양한 이익을 취하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자 떠나버렸지.  제국주의의 본모습인 거야.

  

[미선]  그런데 왜 거두지 않던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어요?

[해월]  앞서 말한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승리로 얻은 캐나다의 넓은 지역과 프랑스가 지배하던 북미 미시시피강 동부 땅의 관리비 부담이 컸어.  전쟁을 치르면서 부채도 산더미였었지.  평화가 오면서 미국식민지로부터 들어오던 금, 은 공급도 중단되고 무기와 군복 같은 보급품도 끊기면서 악화된 영국경제가 더 악화되는 상황이었어. 그렇게 되자 인디아 경기도 나빠지면서 해결책을 강구한 결과가 북미식민지에 대한 과세법 제정이었던 거야. 


[미선]  영국경제 해결책 중 하나가 북미 식민지 과세였군요? 

[해월]  그렇게 생각해!  영국의회가 북미식민지에 내린 납세명령은 1764년의 Sugar Act와 Currency Act로부터 시작하지.  Sugar Act는 식민지를 대상으로 외국과 교역 시 관세를 걷어내기 위해 1651년 제정한 Navigation Act (항해법)의 연장선이었는데, 이는 북미로 수입해 들어오던 물품에 대한 관세부과법이었어. 그동안 수입해 오던 당밀에 대한 관세를 줄이는 대신 정제설탕에 대한 관세를 높이고, 외국 Rum 수입을 금지시켰지.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산업인 럼주 생산에 필요한 설탕과 당밀 수입에 직격탄이었어.  게다가 와인, 커피, 직물 등 외국수입품에 대한 세금을 매기면서 주요 수출품인 목재를 유럽으로 보내는 것을 금지시켰어. 여기에 북미식민지에서의 화폐발행을 중단시키는 Currency Act까지 발효시키면서 Sugar Act로 발생하는 관세를 모두 금이나 은으로 지불하라고 명령한 거야.


[미선]  아!  식민지 사람들의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하네요!

[해월]  달궈지기 시작한 감정에 Quartering Act와 Stamp Act로 기름을 부으면서 절정에 달해.  영국군인과 군대에 미국 민간인 주택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 ‘주택법’이었고, 모든 삶과 직결되는 법적 서류, 학술논문, 공직임명장, 신문, 서적, 놀이카드 등 모든 인쇄물에 과세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지’를 붙이는 것이 Stamp Act였어.  안 그래도 영국 자체 경기침체가 곧 인디아의 경제 악화로 이어져 북미 뉴잉글랜드에서 공급하던 가축, 목재, 어물 등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수많은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상인들이 파산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물가는 오르고 임금은 줄어들어 일반인들의 삶이 어렵고 게다가 ‘천연두’ (smallpox)까지 퍼져 난리인데 세금까지 내라니 ‘우리가 노예냐’, ‘폭정이다’, ‘대표자 없는 세금은 못 내겠다’는 등 반발이 치솟게 되었지.


[미선]  그렇게 폭발한 감정이 끝내 독립을 추진한 전쟁으로 간 원동력이었겠네요.

[해월]  그렇지!  더 자세한 당시 상황은 다음 기회에 알아보기로 하자.  그렇게 북미 13개 주 식민거주자들과 영국은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사이가 되어버렸고, George Washington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미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강한 민주주의 국가가 1789년 태어난 거지.  새로운 헌법도 만들고 정부, 의회, 사법제도를 구축하면서 강대국이 되었고 스스로 또 다른 제국주의국가의 면모를 일궈나가게 되었어.  프랑스, 스페인, 영국을 의식한 남미침략금지를 선언한 ‘Monroe Doctrine’ (1850)이 이를 증명하고 있어. 미국의 5개 부속령 들도 일종의 식민지라 볼 수 있을 거야.  Puerto Rico에서는 미국의 주로 승격되고 싶어 안달이지.


[미선]  제국주의로 면모를 바꾸면서 미국땅에 황제님이 나타나신 건가요?

[해월]  글쎄 말이야!  나도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얘기가 너무 궁금해 알아보았더니 실제로 그런 분이 존재했다는 거야.  그것도 대도시 San Francisco에서.


[미선]  제국주의 왕에 대항해 목숨 걸고 싸웠던 나라인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해월]  미국 정부가 출범한 지 70년 된 1859년 홀연히 자칭 ‘미국황제 노턴 1세’ (Norton I., Emperor of the United States)라는 사나이가 San Francisco에 출현하지.  그의 이름은 Joshua Abraham Norton이라고 하고, 영국에서 태어난 백인이었어.  당시 그의 나이 41세!


[미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Joshua와 링컨 대통령의 이름까지 가진 멋진 분 같네요!

[해월]  1818년 2월 4일 런던의 한 동네에서 John Norton과 유태계 어머니 Sarah Norden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인 1820년 부모와 함께 영국정부의 남아프리카 식민정책으로 보내지던 정착민 대열에 끼게  되었어.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전혀 알려진 게 없고, 1845년 경 Cape Town을 떠나 영국의 Liverpool을 거쳐 1846년 3월 보스턴으로 입국했어.  그리고 1849년 11월 23일 Franzeska 호를 타고 샌 프란시스코 항에 들어왔다고만 알려져 있지.


[미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보통사람과 별 다른 게 없는 것 같은데요?

[해월]  한 가지 다른 것은 샌 프란스시코항에 도착한 그의 주머니에는 상업에 종사했던 부친의 유산을 상속한 거금 4만 달러가 있었다는 것이지.  이 자금을 상품시장과 부동산에 투자해 25만 달러라는 재산으로 크게 불린 그는 곧 그 지방의 유지가 되었고 유명인 세상에 끼게 돼.  그러다가 1852년 중국에 심한 기근이 들면서 쌀값이 오를 것이라는 정보를 얻게 되고, 마침 페루에서 쌀 20만 파운드를 싣고 들어오는 배가 있다는 정보에 홀려 그 배에 실려진 쌀 전량을 파운드당 12.5센트에 사들이는 계약을 맺었어. 


[미선]  엄청난 부를 챙길 기회를 잡은 거예요?

[해월]  떼돈을 벌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엉뚱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지!  나만 똑똑하고 나만 정보를 독식한 게 아닌 거지.  똑같은 꿈을 가진 여러 척의 배가 동시에 많은 양의 쌀을 싣고 들어오면서 값이 파운드당 3센트로 폭락하고, 그는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된 거야.  쌀의 품질이 약속과 달리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계약파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에서 패소하였고, 졸지에 빚더미에 앉게 되면서 소유하던 부동산 등 재산이 차압당하게 되는데 이때가 1856년 8월이야.


[미선]  38세에 매우 쓴맛을 보게 되네요.  그 뒤 어떻게 되었어요?

[해월]  가난에 찌든 그였지만 재기하려고 애썼다고 해.  1858년에는 연방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지.  그러던 그가 1859년 7월 갑자기 ‘미국민에 대한 선언문’이라는 것을 발표하고, 미국의 법적 ∙ 정치적 구조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두 달 뒤인 9월 17일에는 지역 언론사를 찾아가 그가 작성한 글을 직접 전하면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한 거야. 그러면서 연방의회를 해산하여 새로운 대표자를 선출한다든가, 의회해산을 위해 군대 동원령을 내린다든가, 황실을 위해 공화국을 해산한다든가 하는 칙령을 발표했지.  


[미선]  정말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을 벌이셨네요!

[해월]  그뿐 아니야!  로만캐토릭과 신기독교에서 본인을 황제로 즉위시키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민주당과 공화당을 금지하는 선언을 하고, 국제적 국가연합을 결성할 것을 지시한다든가, Oakland와 San Francisco를 연결하는 현수교 또는 터널을 건설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지.  낮에는 공원, 도서관, 신문사들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공연장 등에서 정치적 모임을 갖는다든가 하면서 실로 괴팍한 행동을 계속해 나갔어.  정신병자로 몰려 한 때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었는데 주민들과 언론에서 들고일어나 곧 풀려났고, 경찰서장이 사과하면서 그 후 그만 보면 길에서 경례를 붙이기도 했다네!

  

[미선]  19세기 코미디네요.  사람들이 재미있어 봐준 거 아닐까요?

[해월]  코미디임에는 확실하지.  그는 또 자기가 세운 정부의 화폐도 발행했어.  50센트 에서 10달러에 달하는 여러 종류의 약속어음 형식의 조잡한 인쇄물 화폐지만 여러 곳의 식당에서 받아 주기도 했데.  그중에 아직도 남아있는 화폐는 시중 경매에서 1만 달러까지 호가한다고 해. Colombo Baking Company라는 제빵회사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 만든 ‘Emperor Norton’s Original Sourdough Snack’이라는 과자를 만들어 팔기도 했어.  그리고 샌 프란시스코 시청에서 그를 위해 황제용 의복도 가끔 보내주었는데 그때마다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거야.

 

[미선]  시 정부에서도 황제의 용모를 챙겨 줄 정도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네요? 

[해월]  노턴황제는 외국정부와도 대화를 나누며 외교정책을 펴기도 했는데, 영국의 Victoria 여왕에게는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면서 양국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자기와 결혼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하와이의 Kamehameha 5세 왕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카메하메하 5 세왕은 미국정부를 인정하기보다는 노턴 황제를 미국의 ‘유일한 지도자’라고 불렀다고 해.  1870년 인구조사표에 보면 그를 624 Commercial Street에 거주하는 50세 남자라고 하고, 직업은 ‘Emperor’라고 적고 있어.  그 아래 ‘그는 미쳤다’ (he is insane)라고 적혀있기도 하지.  


[미선]  별스러웠던 분의 마지막도 궁금하네요.  

[해월]  1880년 1월 8일 저녁, California Academy of Sciences에 강의하러 가던 황제는 길가 코너에서 갑자기 쓰러졌는데, 마침 지나던 경찰에 의해 마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지만 의료진을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어.  당시 지역 신문에서는 ‘달빛 없어 어둡고 비까지 내리는 밤에 신의 부름을 받은 우리의 황제, 생을 마치다!’라고 보도했어.  나중에 알려진 얘기지만 상당한 부를 지녔었다는 소문과는 달리 재산이라고는 푼돈 5 - 6달러에 늘 지니던 지팡이와 모자, 우산 그리고 잡동사니 등이 전부였다고 해.  시에서 처음에는 싸구려 관으로 장례를 치르려 했었는데, 지역주민들과 상공인들이 기금을 마련해 고급 나무로 만든 관을 마련해 황제로서의 존엄을 살펴주었다고 하네.  샌 프란시스코 시민 1만여 명이 도열해 그의 장례를 엄숙히 치렀는데, 62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친 그의 유해는 1934년 이장되었고 현재는 캘리포니아 Colma 시에 있는 Woodlawn Memorial Park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지.  

미국 유일의 황제를 시간 내서 한번 알현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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