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의 숙명
1939년 9월 1일 Nazi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 (World War II).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 1억 3천만 명 이상의 군인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전면전에서, 사망한 사람이 민간인 포함해서 7000만 명에서 8500만 명에 달하는 인류 최악의 살육전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4년이 되는 1943년 여름 이탈리아 시실리 (Sicily)를 침공한 연합군을 반겼던 이탈리아인들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를 실각시키고, 그해 9월 3일에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총부리를 동맹국이었던 독일로 돌립니다.
600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Jews)을 학살하고, 수많은 나라에서 끝없는 살상과 약탈을 자행하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독일도 결국 1945년 5월 8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문서를 바치면서 유럽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한편 1868년 1월부터 1869년 5월까지 도쿠카와 막부를 상대로 ‘戊辰전쟁’(Boshin War)을 치르면서 정치권력을 되찾은 일본의 메이지(明治) 122대 국왕은 그동안 막부가 미국 및 유럽의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들을 재조정하면서 여러 국가로부터 자문단을 초청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급속도로 근대화에 접근합니다.
1876년 2월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청과의 조공관계를 청산케 한 메이지정부는 조선이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땅에서 청과의 제1차 청일전쟁을 치릅니다. 결과로 청은 패하고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을 차지합니다.
1900년 청의 개혁세력들이 외세를 배척하자고 일으킨 ‘Boxer Rebellion’에 영국의 요구를 기회로 전쟁에 참여한 메이지정부는 1901년 9월 청과 연합국이 체결한 ‘Boxer Protocol’을 통해 청나라 주둔권을 얻어내고,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와 한판 벌일 구실을 만들어 냅니다. 조선을 집어삼킬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일본은 청을 누르고 뺏은 요동반도에 조약일부를 부정하면서 숟가락을 얹은 러시아가 눈엣가시였죠. 러일전쟁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주로 해전으로 전개되고, 러시아의 패전으로 사하린 일부와 만주를 빼앗습니다. 끝내 조선과 1905년 11월 17일 ‘乙巳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 8월 22일에는 ‘한일병합조약’ (庚戌國恥경술국치)으로 이어집니다.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본의 타이쇼(大正) 123대 국왕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청의 칭따오항과 기타 조차지역, 그리고 태평양상의 여러 섬을 차지하게 됩니다. 나아가 1918년 7월에는 미국의 윌슨정부의 요청으로 시베리아탐험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탐욕을 보이기도 합니다.
1920년대 들어 ‘타이쇼 민주주의’라는 별칭의 정치체제로 변화하던 일본제국주의는 1926년 Showa (昭和) 124대 왕이 등극하면서 군국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 팽창주의가 국가이념으로 자리하기 시작합니다. 국왕(천황)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자는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하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키자면서 원자재 확보 등 이유로 해외로 활동영역을 넓혀야 된다는 공감대가 경제인과 정치인들 사이에 형성됩니다.
1931년에 중국 북동쪽에 위치한 만주를 침략하여 꼭두각시 ‘만주국’을 세우고, 1933년에는 만주국과 접경을 이루는 Rehe 성 (熱河省)을 접수하고, 1936년에는 내몽고에 같은 꼭두각시 정부 Mengjiang (蒙疆)을 세워 반일세력을 억압하는 전초기지화 했습니다. 1937년에는 중국을 재차 침략하여 수십만 명의 인명살상을 자행한 ‘南京학살’을 일으키며 Wang Jingwei (汪精衛)를 대표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고 장개석과 모택동을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사망한 중국인의 수가 민간인 포함 약 2천만 명에 달합니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은 1940년 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 French인도차이나와 중국남부로 이어지고 남경에서의 학살을 목격한 미국을 포함한 서구제국은 일본의 약점인 전략물자와 원유 등 공급을 중단시키며 압박을 가하는 가운데, 일본은 이에 대한 저항으로 1940년 9월 27일 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동일전선을 형성하게 될 ‘삼국협약’ (Tripartite Pack)을 맺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몰아내고 원유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미국해군력제압에 목표를 세웁니다. 미국의 강력한 경제력을 알고는 있지만 태평양 진출을 막음으로써 이들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빨리 점령하고 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로 하고 1941년 12월 7일 주도면밀하게 Honolulu의 Pearl Harbor를 공격, 미 해군의 전력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2,500 명의 인명도 살상합니다. 그 후 일본은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Central Java, Malang, Cebu, Sumatra, New Guinea, Guadalcanal을 포함한 태평양 섬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갑니다.
[정도] 선생님! 인류역사상 그렇게 참혹했던 전쟁을 주도했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는 어땠어요?
[해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의 Braunau am Inn시에서 여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1945년 4월 30일 56세에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지. 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게 느끼고 참회하면서 떠났기를 바라!
[정도] 인류역사에는 전제군주국가체계로 인하여 많은 독재군주 또는 독재자가 있었겠지만 히틀러만큼 수없이 많은 슬픈 가족을 만들어낸 지도자는 없겠죠?
[해월] 정도말이 맞아! 국지전이 아니라 오대양 유대주를 돌아다니며 끝없는 욕심으로 살육을 일삼고, 인류의 고귀한 문화를 말살한 지도자가 맞아!
[정도] 도대체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해월] 글쎄. 왜 그리 엄청난 원한을 쌓고 사라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그의 말과 행동을 분석해 보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겠지? 잠시 그의 가족 배경을 보면서 추측이라도 해보자!
[정도] 가족의 역사를 보면 왜 아돌프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싫어했고, 독일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해월] 아니! 아직도 딱히 답은 없어. 궁금하니까 보자는 것이지. 세상에 전해지는 얘기를 보면, 우선 아돌프의 아버지 (Alois Hitler 1837.6.7 ~ 1903.1.3)의 아버지 그러니까 아돌프의 친할아버지가 누군지 아직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는 것이 좀 문제야! 혼외자로 태어 난 아돌프의 아버지는 태어났을 때 어머니 마리아(Maria Anna Schicklgruber 1795-1847)의 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 그러다 다섯 살 때 어머니 (아돌프의 할머니)가 새 남편 (Johann Georg Hiedler)을 얻었고, 10살 때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새아버지의 동생 (Johann Nepomuk Hiedler)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지.
[정도] 할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대신 그의 동생네 집에서 자라난 아버지를 둔 아돌프라!
[해월] 아돌프의 아버지 아로이스는 39세가 되어서야 세관직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신분을 살리기 위해 의붓아버지 Georg를 친부라고 하면서 교회 신부에게 신분세탁을 부탁하지. 태어났을 때 세례등록증에 아버지 이름 대신 '혼외자' (illegimate)라는 기록이 들어갔기 때문에 아버지 이름이 들어간 세례증명서가 필요했던 거야.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신분을 고치려 한 것은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까지 사망하기를 기다려야 했다는 거야. 출생을 숨겨야 했었던 생부도 그의 부인이 사망하기를 기다렸다가 일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집안에 시끄러운 일이 안 생기도록 조용해 지기를 기다린 거지.
[정도] 아! 그랬군요. 왜 그리 오래 기다렸다 처리했나 했어요. 모든 게 비밀이었겠지요!
[해월] 이때 아돌프의 아버지는 그 의붓아버지 성(姓)인 히들러(Hiedler)를 자기의 성으로 변경하게 되는데 이때 ‘Hiedler’가 아니고 ‘Georg Hitler’라는 이름으로 의붓아버지 성함을 등록하고 자신의 성도 따라서 ‘Hitler’로 등록을 했다는 거야. 이 또한 아무도 그 이유와 과정을 모르고 있어. 결국 히틀러(Hitler)라는 이름은 정식 성이 아니라 창조된 성이 된 셈이야. 그리고 아돌프는 아버지 아로이스의 첫 번째 부인이 아닌 세 번째 부인과 사이에 6자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나면서 곡절 많은 삶을 시작하지.
[정도] 아돌프 히틀러는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니 어떤 집안의 자손인지 모르고, 성도 혈육이 아닌 엉뚱한 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이네요! 머리가 복잡해지는데요?!
[해월] 할아버지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지. 위에 얘기한 대로 의붓아버지의 동생 Nepomuk이 결혼한 입장에서 Maria와 사이에 혼외자를 낳은 후 이를 숨기기 위해 떠돌이로 살던 형 Georg와 결혼시키고, 마리아가 사망한 후 형이 집을 나가버리자 Alois를 데리고 살면서 돌보았다는 설과, Maria가 오스트리아의 Graz라는 동네의 유태인집 가정부로 일했을 때 집주인 (또는 그 집의 19살 난 아들)하고 사이에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아이가 아돌프의 아버지라는 주장이 있어. 아돌프가 정권을 잡자 그가 유태인 혈육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던 이유야. 어쨌든 아돌프 부자간 신분세탁 또는 신분정리는 꼭 필요했을 거야.
[정도] 그래도 아돌프는 형제가 많았네요?
[해월] 형제는 많았는데 문제가 좀 있어. 아버지와 결혼한 세 번째 부인 Klara Polzl (아돌프의 친어머니)이 아버지의 친부 (아돌프의 친할아버지)로 알려진 Nepomuk의 손녀딸이라는 사실이야. 그래서 가까운 혈육 간 결혼을 했다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다른 형제 넷은 유아 때 모두 사망하고 말았어.
[정도] 그런 가족의 역사를 아돌프는 알고 있었겠지요? 어쨌든 일단 아돌프의 할아버지는 할머니 마리아와 법적 결혼한 ‘Johann Georg Hiedler’로 일단락된 것이네요? 성의 철자는 바뀌었지만…
[해월] 그런 셈이지! 호적정리를 한 셈이야. 아돌프 히틀러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독일의 파소(Passau)라는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평생 사용하게 될 그 지방의 어투를 익히게 되었다고 해. 정통 독일어가 아니었지. 다섯 살 때 다시 오스트리아의 Leonding으로 이사했다가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Hafeld라는 곳으로 이전했지. 이때부터 부자지간의 끝없는 전쟁이 시작되었어. 아돌프가 다니던 학교의 엄격한 규칙 준수를 거부하면서 외골수로 완고했던 아버지는 매질을 시작했지.
[정도] 저런! 예전 아버님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였네요!
[해월]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짓던 농사일이 실패하면서 다시 Lambach로 이사했는데, 그때 여덟 살이던 아돌프는 노래를 배우고 교회에서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도 불렀어. 한때 신부가 될 생각도 하게 되었다는 순간이지. 외향적 성격을 갖고, 자신감과 의지가 강했던 아돌프에서 큰 변화가 온 것은 작은 동생 Edmund가 홍역으로 사망하는 사건이었어. 동생마저 잃은 아돌프의 성격이 급격히 내향적이고 폐쇄적 그리고 아버지와 선생에 대해 반항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지.
[정도] 드디어 미래의 아돌프 히틀러가 형성되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네요!
[해월] 채 열네 살도 되지 않은 1903년 1월 아버지가 갑자기 흉막출현증으로 사망하자 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아돌프는 열여덟 살 때인 1907년 어머니의 도움으로 미술공부차 Vienna로 떠났지만 그 해 12월 어머니마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돼. 스무 살이 된 아돌프는 빈털터리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막노동도 하고 비엔나 이곳저곳을 다니며 동네풍경을 수채화에 담아 팔기도 했지. 음악과 건축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이때 그의 운명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그런 예술이 아니라 ‘인종차별적 선동주의’ 정치풍토였어. 독일민족주의자들이 ‘독일민족주의’ (German Nationalism)를 외치고, ‘반유태주의’ (Anti-Semitism)를 외치는 사람들이 동유럽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을 강하게 위협하는 분위기가 그의 정치적 감성을 깨우기 시작했지.
[정도] 스무 살 청년의 열정적 가슴속에 앞으로 살아나갈 방향이 뜨겁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요?
[해월] 그 같은 느낌으로 젊음을 시작한 아돌프 히틀러!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의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정도야!
[정도] 아! 예! 그러죠! 어디까지 했죠? 아!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고 하셨죠!
[해월] 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 3국 중 이제 하나 남은 나라는 ‘제국주의 일본’(Imperial Japan). 연합국이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으로 일본의 무조건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촉구했지만 복잡한 국내상황에 우유부단했던 일본의 쇼와 히로히토 (Hirohito 裕仁) 국왕은 무모한 전투를 태평양지역에서 계속했어. 2차 대전 중에 나치 독일과 일본에서 가공할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에서도 꽤 진척이 있었다고 해.
[정도] 가공할 무기라면 원자폭탄 같은 무기인가요?
[해월] 맞아! 나치 독일 등 유럽국가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들은 독일이 진행하고 있던 원자폭탄 연구를 염려하면서 미국에서 서둘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 미국정부로 하여금 ‘맨해튼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비밀작전을 수립토록 하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아인슈타인 등이 작성한 편지가 전달되고, 1940년에 예산이 책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원자폭탄 연구가 시작되었지. 마침내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엘라머고도 (Alamogordo)에 있던 ‘트리니티 시험장’ (Trinity Test Site)에서 그 최초실험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뤄냈어.
[정도] 그 프로젝트를 이끈 사람들이 얼마 전 영화로 개봉돼 알려진 '오펜하이머' 박사 등인가요?
[해월] 그래! 그 영화제목에 등장한 사람, 핵물리학자 J. Robert Oppenheimer가 핵폭탄 디자인을 맡은 연구소의 책임자였지. 독일의 화학자 Otto Hahn과 Fritz Strassmann 등이 1938년 발견한 ‘핵분열’ (nuclear fission) 이론이 미국으로 건너와 증명되었고, 그들 모두가 영국과 캐나다의 지원하에 미국이 주도하는 핵폭탄을 개발했던 역사적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야.
[정도] 핵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이 이제 전쟁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쥐게 된 거죠?
[해월] 물론이야. 일본에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거부당한 연합국은 일본 본토 총공격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 전통적 군사공격을 하자는 측(멕아더 장군)과 전통적 전투는 아군의 사상자도 너무 많이 생기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원자탄으로 공격하자는 측(아이젠아워장군)으로 나뉘는 상황에서 영국의 지지를 얻은 미국의 트루만 (Harry Truman) 대통령은 후자를 선택하지.
[정도] 전쟁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미국정계도 어지러운 상황이었겠네요!
[해월] 어지럽고 어려운 상황이었지.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정계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로 떠들썩하면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어.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만은 전쟁도 빨리 끝내고 전후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빨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게 돼.
[정도]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이 원자탄투여를 재촉시켰겠군요?
[해월] 당시에는 일본에서도 원자탄제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단지 실험에 성공을 못했을 뿐이야. 만약 미국보다 먼저 성공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를 일이야!
[정도] 선생님! 그런 시나리오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일본도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엄청난 죄를 저질렀었는데 거기에 핵폭탄까지 보유하는 사태가 왔다면 정말 상상하고 싶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겠죠!
[해월] 그렇지?! 너무 흥분하지 마! 어쨌든 1945년 7월 25일 일본의 4개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은 떨어지고, 그 첫 번째 9,000파운드 무게의 우라늄 핵분열 폭탄인 ‘작은 소년’ (The Little Boy)이 미군이 점령한 태평양상의 마리에나 제도(Mariana Islands)의 티니안(Tinian)에서 대기 중인 B-29 폭격기 ‘에뇰라 게이’ (Enola Gay – 조종사 엄마의 이름. 사진)에 실려지게 돼. 1차 목적지는 일본 동경에서 남서쪽으로 500마일 떨어진 히로시마 (Hiroshima 廣島) 시, 2차 목적지는 1,000마일 떨어진 고쿠라(Kokura 小倉, 현재는 Kitakyushu 北九州) 시였어. 황실정원 이외엔 전략적 의미가 없던 동경(Tokyo)은 배제되었고, 주요 군사령부와 무기제조공장이 있던 두 도시를 먼저 목적지로 정한 것이지.
[정도] 비로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네요. 동경이 투하지에서 제외된 것이 의아하지만요!
[해월] 일본의 운명이라고 봐야겠지! 8월 6일 오전 8시 30분 1차 목적지 히로시마 상공의 하늘이 화창하자 TNT 12,000톤의 위력을 가진 ‘작은 소년’은 투하되고, 지상 2,000 feet (609.6m) 상공에서 인류최초의 원자탄은 가공할 위력을 보였어! 순식간에 도시의 90%가 파괴되고 15만 명이나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어.
[정도] 그런 참혹한 현실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해월] 히로히토 (Shōwa昭和)와 기득권자들은 항복하지 않았어. 일본인 정서로 보아 항복이 죽음보다 싫은 행동이었을 테니까! 미국은 두 번째 플루토늄 원자탄인 ‘뚱뚱보’ (Fat Man)를 같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B-29 폭격기 ‘박스카’ (Bockscar 또는 Bock’s Car라고도 함)에 탑재하여 1차 목적지인 고쿠라시를 향해 발진시켰어. 그러나 8월 9일의 고쿠라시 상공에는 조종사들이 목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구름과 연기가 끼어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제2의 목적지인 나가사끼 (Nagasaki 長崎)로 운명의 방향이 틀어진 거야. 오전 11시 2분 1,000파운드 무게, TNT 22,000 톤의 파괴력을 가진 ‘뚱뚱보’는 지상 1,600 feet(487.68m)에서 폭발하면서 한순간에 8만 명의 목숨을 앗으며 6년간의 비극을 마무리하게 된 거야. 조선인도 이들 두 곳에서 1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해. 여기서 ‘고쿠라의 행운’이라는 웃지 못할 희극이 두 번씩이나 벌어지며, 고쿠라는 ‘꼬꾸라 지지 않는 행운의 도시’의 상징이 되었지.
[정도] 세나라 지도자들 모두가 제 이름같이 ‘정도’(正道)로 살았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요!
[해월] 바로 정답이네! ‘정도’ 지키는 삶은 고요한 행복의 지름길일 거야! 인류역사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대량살상무기의 가공할 파괴와 북쪽 소련이 8월 9일 새벽을 기해 전쟁선포와 동시 만주에 침입하면서 히로히토로 하여금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지. 마침내 8월 14일 玉音放送局(Jewel Voice Broadcast)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大東亞戰爭終結 詔書 (Imperial Rescript on the Termination of the Great East Asia War)를 녹음하고, 다음날 정오에 라디오로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해방을 맞이하고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지.
[정도] 죽기보다 싫은 항복을 하면서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을 저주하지 않았을까요?
[해월]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이 동양인이라고 하잖아? 최근에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공원’에서 자원봉사하는 한 학생에게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미국을 증오하나?”라고 물었더니 그 녀의 답이 “우리가 증오하는 것은 미국이 아녜요. 우리가 증오하는 것은 전쟁 그 자체입니다.”라고 했다는 거야. 한국인에게 일본에 대한 질문을 하면 어떤 답이 나올는지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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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이 났지만 정작 연합국과 일본사이의 평화조약(Peace Treaty with Japan)은 1951년 9월 8일에 와서야 미국의 San Francisco에서 맺게 되고, 당시 초청된 51개국 중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를 제외한 48개 국가가 조약에 서명하면서 당사국이 됨과 동시에 보상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인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35년간의 민족적 비극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었다는 역사 때문에 이 현장에 초청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