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움받지 않으려 애쓸까

by 심홍석


나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화가 난 부모님이 너무 무서웠고 나는 늘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 했다. 부모님이 화가 나는 건 대부분 내 탓이라고 여겼다. 나중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던 결국 나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웠다. 나는 늘 꼬투리 잡힐 것이 많은 아이였으니까. 결국 나에게 불똥이 튀게 되면 나는 또 내 탓을 했다.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는 것은 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 전략은 언젠가는 망하게 되고 만다.


어릴땐 부모님의 눈치만 보면 되지만 자라면서 말을 잘 들어야 할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그들의 기대나 요구는 점점 광범위해지고 복잡해진다. 그러다보면 들어야 할 ‘말’들은 서로 충돌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어떤 사람이 되든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대신 누군가를 화나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 사람의 요구가 그때 그때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의 말을 잘 듣겠다고 하는 짓들 때문에 되려 누군가의(심지어 그 사람의)미움을 사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래도 X랄, 저래도 X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은 괜찮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들이 더 많다. 이등병이 자신에게 화가난 정상병에게 ”권병장님이 그렇게 하라는데 저보고 어쩌라구요!“ 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대리가 자신을 혼내는 부장에게 “과장님 때문에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냥 자신이 고스란히 미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미움을 받지 않아 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봐야 그것은 헛고생이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개뿔. 미움받을 ‘용기’라고 하면 마치 내가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어차피 내가 온갖짓을 다 해봤자 미움받을 ’팔자’다. 우린 어차피 미움받을 예정에 놓인 존재들이다. 참 기구하다.


자신의 팔자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사람은 어릴적부터 상당한 자유함을 진작 누리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욕구에 집중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내 생각, 내 감정, 내 욕구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구가 더 중요하다.




나에게 오래전에 상담을 해주셨던 한 멘토 목사님이 계시다. 그 목사님과 몇 달 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에 갔다. 각자 마실 음료를 골랐고, 목사님께서 곁들여 빵도 골라보라고 하셨다.


“목사님 어떤 빵 좋아하세요?”


”홍석이가 한번 골라봐.“


”저는 상관없어요. 목사님 드시고 싶은거 있으세요?”


그러자 목사님이 잠깐 웃으시더니 내 얼굴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


“홍석아. 괜찮으니까 너 먹고싶은 빵 한번 골라봐.”


빵을 고르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심지어 살짝 식은땀이 났다. 내가 혼자 먹을 음료나 빵을 고르는 것은 사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먹을 빵을 고른다고 하니 그게 나한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한참을 쩔쩔 매다가 목사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빵 하나를 집어들고 쟁반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오. 넌 그 빵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 빵을 먹을래” 그러더니 소금빵을 하나 집어들고 쟁반에 올려놓으셨다.


상담실에서 많은 내담자들의 어딘가를 향한 미움을 만난다.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누군가를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이제 곧 상담의 여정 가운데 마주하게될 자신의 문제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미워하며 견디고 있다는 것을. 이를테면 자신의 결핍과 상처로 인한 수치심과 좌절된 바람들에 대한 무력감, 스스로 져야하는 책임감 말이다. 우린 때때로 미워할 누군가가 필요해진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우리는 ’미움받을 팔자’에 놓여있는 동시에 또한 ’미워할 팔자‘에도 놓여있다.


미움을 받으면 내 안에 자동반사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생존에 대한 공포다. ‘곧 나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어릴적 트라우마가 주는 감정이다. 둘째는, 자괴감이다. ‘나는 또 미움받지 않는 것에 실패했어.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자기학대적인 생각이 주는 감정이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었다. “괜찮아. 넌 안전해.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널 이해해.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잖아.” 언제쯤 나는 나 자신에게 저 말들을 진심으로 들려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