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29화, 빛은 이미 거기 있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
19세기 조선의 선비가, 12세기 몽골 초원의 유목민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그들은 모두 지옥에 간 걸까? 이 질문은 신학보다 '양심'에서 먼저 올라온다. 하나님은 정말 그렇게 불공평하신 분일까?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공평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통 개혁 신앙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간다.
성경은 단호하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행 4:12). 복음은 '여러 길 중 괜찮은 하나'가 아니다. 유일한 문이다. 문제는, 그 문 앞에 서보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심판받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빛의 원리'로 들어가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놀라운 선언을 한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롬 1:19). 모든 인간에게는 이미 빛이 비쳤다. 복음서의 활자처럼 선명하지는 않았어도, 산과 별과 양심 속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희미한 빛.
조선시대 선비들이 말한 '하늘님', 고대 그리스인들이 찾던 '절대 선', 아프리카 부족이 두려워한 '높으신 분'. 이것들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긴 지문이다. 칼뱅은 이를 ‘신을 향한 씨앗’이라 불렀다. 씨앗은 나무가 아니다. 하지만 씨앗 없이는 나무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이 빛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을 향한 방향 감각'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지만, 나침반 자체가 북극은 아닌 것처럼.
사도행전의 고넬료를 보라.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구제했고, 기도했다. 빛을 향해 걷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를 불러라. 그가 네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리라"(행 11:14).
하나님은 고넬료의 '그리움'을 인정하셨다. 하지만 그리움만으로는 부족했다. 복음은 종교적 감정이나 도덕적 열심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죽고 부활하신 사건'이다. 그 사건 없이는 죄의 벽을 뚫을 수 없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우리는 '빛의 양'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요"(눅 12:48). 복음을 듣고 거부한 사람과,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은 같은 잣대로 재지 않으신다.
복음을 들었는데도 "예수? 관심 없어"라고 한 21세기 서울 사람과, 산과 별을 보며 "저 너머 누군가 계시겠지" 하고 고개 숙였던 15세기 강원도 농부를, 하나님이 동일하게 심판하실 리 없다.
심판의 핵심은 '빛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 빛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다. 10와트 전구 아래 있던 사람에게 100와트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으시다. 공평하시되, 그 공평의 기준이 우리 상식보다 정교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조선 사람들은 낯설어하지 않았다. '하늘님'은 이미 그들의 언어 속에 있었다. 완전한 계시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잔향(殘響)이었다. 라디오 주파수가 약하면 잡음 섞인 소리가 들리듯, 일반 계시는 흐릿하지만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 목소리를 외면한 사람과,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 숙이고 하늘을 우러른 사람이 같을까? 하나님은 그 차이를 아신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여기서 정통 신학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스도 없는 구원은 없다." 모든 구원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다.
다만, 십자가의 '적용 방식'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아브라함은 십자가 이전 사람이었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4:3). 구약의 성도들도 오실 메시아를 '희미하게' 믿었고, 그 믿음이 십자가와 연결되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도, 빛을 따라 하나님을 찾았다면, 그 사람의 구원 역시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단지 그 연결의 신비는 우리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신학보다 좁을 리 없다.
"우리 조상은 지옥 갔나요?" 이 질문은 사실 잘못된 질문이다. 옳은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빚이다. 빛을 받았으면, 빛을 비춰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묻고 계신다. "누가 그들에게 갈까?"
빛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단 한 세대도, 단 한 사람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다.
다만 이제 우리가 그 빛을 '이름'으로 알게 되었다. 예수. 그 이름을 아는 자의 책임은 무겁다. 전도지를 돌리는 열심보다, 그 이름을 닮아가는 삶이 먼저다.
그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예의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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