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왜 LGBTQ나 성 문제에 그렇게 보수적인가?

[궁금했성경] 37화, 자유를 외치는 시대, 진리는 여전히 방향을 묻는다

by 허두영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왜 동성애를 죄라고 하나요? 사랑하는 게 뭐가 나쁜가요?" 교회는 종종 그 물음 앞에서 멈칫한다. 그가 묻는 건 단순한 윤리의 경계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랑은 축복이 되고, 어떤 사랑은 금지가 되는가. 기독교가 LGBTQ나 성 문제 앞에서 '보수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의 출발점이 하나님인가, 인간인가에 달려 있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이 위험한 이유


오늘의 문화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사랑의 방식도 다양할 수 있죠." 그럴듯하다. 위험할 만큼. 하지만 성경은 이 다양성을 인간이 만든 가치로 보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창 1:27, 2:24). 성경에서 '성'은 생물학 교과서의 한 챕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창조 질서의 언어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단순히 종족 보존을 위한 설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언약과 책임 속에서 완성되도록 설계된 관계의 문법이다. 로마서 1장은 그 질서가 무너진 세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느니라"(롬 1:26–27). 하나님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 자신이 신이 되고, 욕망이 곧 진리가 되는 순간, 질서는 증발한다. 기독교의 '보수성'은 이런 해체의 시대 속에서 창조주의 좌표를 잃지 않으려는 신앙의 본능이다.


보수는 금기가 아니라 보호다


많은 이들은 성경의 윤리를 금지 목록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십계명의 “간음하지 말라”는 쾌락의 억압이 아니라 관계의 존엄을 보호하려는 선언이다. 다리 난간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자유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추락을 막는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돼라"라는 명령 또한 번식의 명령이 아니라 헌신과 책임의 훈련이다.


성경의 '보수성'은 인간의 욕망을 제한하기 위한 통제 장치가 아니다. 그 욕망이 자신을 파괴하지 않게 하는 보호 장치다. 중력이 억압이 아니라 세상을 붙잡는 질서인 것처럼, 하나님의 윤리도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래서 성경의 윤리는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의미' 안에서 누리게 하는 질서다.


‘사랑이면 괜찮다’라는 위험한 함정


"사랑이면 괜찮다." 오늘의 세속적 윤리는 이 한 문장으로 모든 논쟁을 종결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이라면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방향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 위에서만 온전해진다. 진리가 빠진 사랑은 결국 욕망이고, 욕망이 신격화되면 사랑은 마치 물건처럼 소비된다.


예수님의 대응을 보라.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 8:11).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사랑은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복시키는 힘이다. 기독교가 LGBTQ나 성 문제에 보수적인 이유는, 죄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더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지 말라"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네가 다친다"라고 경고하시는 아버지다.


과학의 한계, '왜'를 묻지 않는 시대


오늘의 과학은 성 정체성을 유전적 다양성이나 호르몬의 문제로 해석한다. 과학은 '어떻게'에는 천재지만, '왜'에는 침묵한다. 과학이 다루는 것은 기능이고, 신앙이 다루는 것은 목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히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의도하셨다'. 그 의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자신을 설계하려 든다.

젠더 이데올로기가 위험한 이유는 성의 혼란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를 대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기독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으면 존재의 질서도 함께 무너진다." 오늘의 성 혼란은 윤리적 혼란이 아니라, 존재론적 반역의 증상이다.


진리는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문법이다


결국 기독교의 '보수'란 시대를 막는 완고함이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는 질서를 보존하려는 신앙의 태도다. 진리를 의미하는 단어 'Conservative'의 어원은 '보존하다(to preserve)'에서 왔다. 기독교는 역행하려는 종교가 아니라, 무너지는 인간의 질서를 붙잡아 주는 방파제다. 세상은 이를 '고집'이라 부르지만, 신앙은 그것을 '거룩의 경계'라 부른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분이 아니라, 자유가 인간을 삼키지 않게 지키시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고 말씀하셨다. 진리 없는 자유는 방종이 되고, 자유 없는 진리는 율법이 된다. 진리와 자유가 함께 있을 때만 인간은 온전하다.


결론 - 진리를 지키는 사랑의 고집


기독교가 LGBTQ나 성 문제에 보수적인 이유는 과거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신격화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창조주이심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보수는 차가운 금기가 아니라 사랑을 지켜내려는 거룩한 고집이다.

시대는 변하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마련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 빛은 오늘도 어둠 속에 묻는다. "너는 누구의 형상으로 지어졌는가?"

기독교의 보수는 바로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신앙의 용기다. 사랑 없는 진리는 폭력이고, 진리 없는 사랑은 방임이다. 기독교의 보수는 그 둘 사이의 좁은 길, 거룩한 사랑의 방정식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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