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63화, 성공이 아닌 형통을 추구하라
크리스천은 '성공'이란 단어 앞에서 혼란스럽다. 화려해 보이지만, 동시에 불안을 안고 있는 단어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추구하자니 복음과 어긋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외면하자니 무책임해 보인다. 성공을 욕망해도, 거부해도 찜찜한 이 긴장이 크리스천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세상은 성공을 결과로 정의한다. 얼마나 올랐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가졌는가.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방향’을 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성공이라는 단어가 직접 언급된 것은 전도서 10장 10절에서 한 번 등장한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success)’에 유익하니라.” 성경에는 ‘성공’ 대신 ‘형통’이라는 단어를 쓴다. 여호수아 1장 7~8절과 역대상 22장 13절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형통은 영어 단어 ’successful'로 사용되었다. 영어성경(NIV)에서는 30회 정도 등장하는 데, '번성(prosper, prosperity)'과 '좋은 결과'를 의미한다.
강대상에서는 성공과 복을 선포하지만, 정작 성경은 조용하다. 성경에서 성공은 인간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가 감옥에 있을 때, 성경은 그를 ‘형통한 자’라고 부른다(창 39:2). 형통은 모든 게 잘 풀리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상태다. 이것이 성경적 성공이다.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계셨고,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의 길 위에 있었다. 여기에 성경적 성공 즉, 형통의 비밀이 숨어있다. 형통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던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전술이나 전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형통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형통의 히브리어 ‘찰라흐(צָלַח)'는 ‘밀고 나아가다', '성공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주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형통은 내가 밀어붙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전진시키시는 힘이다. 따라서 형통한 사람은 결과를 조급히 구하지 않는다. 그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함을 안다.
세상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만, 하나님은 '바르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형통은 목표에 도달한 자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자의 여정 기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유 없이 부르신 적이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라는 말은, 어둠 속에서 그냥 살아남으라는 명령이 아니다. 밝게 빛나라는 명령이다. 성경적 형통은 탁월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탁월함은 '나의 능력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반영'이다. 하나님은 혼돈에서 질서를, 무(無)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셨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우리는 탁월하게 일하고, 진실하게 행동하며, 책임을 아름답게 감당하는 존재로 부름받았다.
다니엘은 바벨론 통치하에서 왕의 신뢰를 얻었고, 요셉은 애굽의 행정 구조를 바꿨다. 그들의 탁월함은 성공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정직과 지혜였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세상보다 더 잘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섬기기 위한 '영향력의 책임' 때문이다. 어느 위치에서건 세상 누구보다 탁월하게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살다 보면 실패해 낙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실패는 낙오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통로다. 다윗의 인생은 이 원리를 증명한다. 그는 승리의 왕이었지만, 밧세바 사건으로 가장 큰 실패를 경험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시 51:11)
다윗은 알았다. 진짜 성공은 죄 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죄를 범한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올 줄 아는 회복이라는 것을. 세상은 실패를 낙오로 읽지만, 하나님은 실패를 회복의 통로로 읽으신다. 그분은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그 상처를 싸매시고 사명으로 바꾸신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잡으라는 신호다. 형통은 넘어지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께 돌아올 줄 아는 인생이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형통의 네 축은 관계, 방향, 순종, 사명이다. 형통은 먼저 하나님과의 동행(창 39:2)에서 시작된다. 요셉이 감옥에서도 형통했던 이유는, 그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이었다. 이어 말씀에 뿌리내린 방향성(시 1:3)이 형통의 나침반이 된다. 세상은 속도를 말하지만, 형통은 말씀에 붙들린 방향의 지속이다. 순종(수 1:8)은 그 방향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힘이며, 하나님께 맞춰 걷는 발걸음이 형통의 길을 연다. 마지막으로 사명(창 12:2)은 형통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 받게 하시되,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흘러가는 통로로 부르신다. 형통은 관계에서 시작해, 말씀의 방향을 따라 순종으로 열매 맺고, 사명으로 흘러가는 삶의 질서다.
성공은 인간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지만, 형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성공은 내가 오른 자리지만, 형통은 하나님이 계신 방향이다. 세상은 속도와 높이를 묻지만, 하나님은 방향과 지속을 보신다. 그래서 진짜 형통은 ‘잘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간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형통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의 지속이다. 성공은 나의 의지를 증명하지만, 형통은 하나님의 동행을 보여준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빛으로 서야 하는 이유다. 맘껏 성공하라. 있는 자리에서 탁월하게 최선을 다하라. 형통의 원리 안에서.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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