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71화, 3가지 믿음, 구원의 점검과 확신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다. 돈 냄새와 쾌락 냄새가 뒤섞인 도시.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고린도적이다(Corinthianize)”라는 말은 곧 “방탕하게 산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항구에는 외국 상인들이 쏟아졌고,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신전 창녀들이 드나들었다. 그 도시는 성공과 쾌락, 개방과 타락이 동시에 끓고 있는 가마솥 같았다. 바로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흥미롭지 않은가? 가장 혼란스러운 곳에 복음이 심겼다. 그런데 그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낸다. 내용은 충격적으로 직설적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이 구절은 불신자 전도용 문장이 아니다.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는 교인들에게 던진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묻는다. “진짜로 너희 안에 예수가 살아 계시냐? 아니면 네가 종교적으로 바쁘다는 사실만 살아 있느냐?” 이건 단순한 조언이 아니다. 영혼을 깨우기 위한 응급처치다. 심장에 전기충격을 가하듯, “정신 차려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도 이 질문은 그대로 유효하다. “나는 오래 다녔는데요, 봉사했는데요, 헌금했는데요.” “옛날에 불 받았는데요, 기도원에서 울면서 밤새 회개했는데요.” 바울은 그런 답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만 묻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이제 조용히, 그러나 잔혹할 만큼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더 단단해지기보다 더 단단하게 굳는다. 말씀 공부 많이 했고, 교리 잘 알고, 무엇이 바른 해석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고, 이단을 분별하는 능력도 있다. 그런데 은혜는 없는 경우를 본다. 사람은 안 바뀌고, 표정은 더 굳고, 말은 점점 칼로 변한다. “그건 비성경적이야.” “그건 틀렸어.” “저 사람은 아직 멀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말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한 해부다.
“회칠한 무덤이여…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
이건 단순한 욕설이 아니다. 1세기 유대 문화에서 무덤은 부정(不淨)의 상징이었다(민 19:16). 절기에는 순례자들이 실수로 무덤을 밟아 부정해지는 일이 없도록, 무덤 겉을 하얗게 칠해 눈에 띄게 표시했다. 겉은 새하얀 석회칠. 속은 부패와 냄새. 예수는 이 이미지를 꺼내 바리새인들에게 던진다. 겉은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죽었다. 왜 죽었는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이론적 믿음’이다. 신앙을 지식의 축적으로 오해한 믿음. 교리를 알고 율법을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상태. 바울도 경고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고전 8:1)
이론적 믿음은 사랑 대신 분별을, 은혜 대신 비판을, 겸손 대신 자의식을 키운다. 이런 믿음은 끝내 율법주의로 흘러간다. 복음보다 자기 의를 더 신뢰하게 된다. 스스로 말한다. “나는 옳다. 나는 바르다. 나는 오래 다녔다. 나는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자기 확신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는 옳다”가 아니라 “나는 용서받았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론적 믿음의 비극은 이것이다. 오래 다닐수록 변하는 게 아니라 썩은 과일처럼 마르고 부패해 간다. 은혜는 줄고, 공허는 늘고, 영혼은 어두워진다. 혼돈, 공허, 흑암. 겉으로는 “주여 주여”인데 속은 무덤이다.
두 번째 유형은 반대편 극단이다. 이들은 지식보다 느낌을 신뢰한다. 찬양하면 눈물이 터지고, 집회만 가면 ‘은혜 폭발’이고, 기도원 가서 밤새 부르짖은 간증이 있다. “그때는 진짜 하나님 살아계신 줄 알았어요.” 맞다. 그 열정은 진짜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교회 안 나갑니다. 마음으로 믿어요.” “언젠간 가야죠.”
예수님은 이 믿음을 이미 진단하셨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0~21)
세 단어가 핵심이다. ‘즉시 기쁨’, ‘뿌리 없음’, ‘곧 넘어짐’.
감정적 믿음은 반응은 빠르다.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 하지만 뿌리가 없다. 말씀 깊숙이 내려간 뿌리가 아니라, 집회 분위기 위에 서 있는 감정의 자리다. 그래서 환난이 오면 곧 무너진다. 신앙이 깊어지지 못하고, 대신 유랑한다. 이 교회, 저 집회, 그 기도원. 결국 믿음의 중심은 복음이 아니라 체험이 된다. 기준은 “내가 느꼈느냐”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너 그때 울었니?”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마 7:22~23)
이건 소름 끼치는 구절이다. 은사, 사역, 뜨거움, 능력, 간증… 다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은 “나는 너를 모른다.” 왜? 그 안에 진짜 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는 뜨거웠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혼자인 고아 상태였다.
감정적 믿음은 결국 신비주의로 기울어간다. 방언했으니 됐다고 믿는다. 예언 들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체험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체험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다. 구원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실제로 거하시는가이다. (고후 13:5) 이 감정적 믿음은 위로는 쉽게 치솟지만,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위로 솟는 불꽃은 인상적이지만, 뿌리 없는 불꽃은 금세 꺼진다.
자, 그럼 질문은 이것이다. 도대체 어떤 믿음이 진짜인가. 어떤 믿음이 환난 속에서도 버티는가. 어떤 믿음이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라고 말할 수 있나. 성경은 이것을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증언한다. 이 믿음은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 위에 뿌리내린 믿음이다. 이 믿음은 내가 시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우리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수련회 감동으로 내가 하나님을 찾아 올라간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복음을 들고 내려오신 것이다. 이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엡 1:13)
그리고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믿음은 감정에서 나지 않는다. 믿음은 정보나 지식에서도 나지 않는다. 믿음은 복음을 들을 때 태어난다. 복음은 추상적인 종교 언어가 아니다. 복음은 사건이다. “그가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그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느니라.” (요일 1:7) 죄 사함. 이것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 구원의 법적 선언이다. 이 믿음은 믿을 때 실제로 내 안에서 일어난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1:13) 인침은 곧 소유 선언이다. “너는 이제 내 것이다.” 이건 감정이 아니다. 신분 변화다.
그래서 이 믿음은 확신을 낳는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하나님의 성령이 내 영에게 직접 증언하신다. “너는 내 자녀다.” 이 단계에 이르면 신앙은 더 이상 “내가 잘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문제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
사도 요한은 이 확신을 아주 노골적으로 밀어붙인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모를 수도 있다”가 아니라, “너는 알게 되어야 한다.” 구원은 주관적 기분이 아니라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어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 있는 믿음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 이건 오만의 선언이 아니다. 은혜의 선언이다. “내가 잘 살았으니까 간다”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자기 것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간다.”(엡 1:13, 롬 8:16)
마지막으로 바울은 다시 우리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 질문은 고린도에만 던져진 질문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 오늘의 나에게도 던져진다. 너는 지금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첫째, 이론적 믿음인가. 율법주의의 껍데기를 쓰고 있으나 속은 메마른, 회칠한 무덤인가. (마 23:27)
둘째, 감정적 믿음인가.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즉시 기쁨으로 받았으나, 환난이 오면 곧 넘어지는 자인가.(마 13:20~21)
셋째, 생명력 있는 믿음인가. 복음을 듣고(엡 1:13), 믿고(롬 10:17), 성령의 인침을 받아(엡 1:13),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그 자리인가.(롬 8:16)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문제는 많은 교회에서 이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신앙을 객관적으로 점검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천국 가겠지” 하며 안일하게 종교 생활하다가 지옥으로 간다. 실컷 종교 노가다하다가 버리운 자가 되는 것이다.(고후 13:5)
가장 불쌍한 사람은 불신자가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았다고 믿었으나, 예수 없이 죽는 사람이다. 은사는 있었지만, 복음은 없었던 사람. 교회는 다녔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없었던 사람. 복음은 추상적이지 않다. 복음은 “너는 내 것이다”라는 아주 구체적인 선언이다.(엡 1:13) 생명력 있는 믿음은 오늘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죽어도 천국 간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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