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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무슨 뜻이며, 왜 원어 그대로지?

[궁금했성경] 78화, 하나님이 번역하지 않고 남겨두신 단어들

by 허두영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번역을 거부하는 단어들을 만난다. 수천 년 동안 언어가 바뀌고 제국이 무너져도, 고집스럽게 본래의 발음을 지켜온 말들. 마치 "이 형태를 잃으면 내 뜻도 함께 사라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할렐루야, 아멘, 임마누엘, 골고다, 에바다…


당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이 단어들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남겨두신 언약의 흔적들이다. 그 오래된 소리 속에는, 식지 않은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다.


1. 찬양과 응답의 언어 -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호흡


성경은 말한다. 인간의 회복은 찬양에서 시작한다고. 첫 단어는 히브리어 할렐루야(הַלְלוּ־יָהּ). "야훼를 찬양하라." 이 명령형 동사는 시편 마지막 장을 열고 닫는 외침이다. 찬양은 단지 기분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찬양은 방향 전환이다. '나'를 중심에서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이다.


또 다른 히브리어 아멘(אָמֵן)이다. 흔히 "그렇게 되기를"로 번역하지만, 원어의 뿌리는 "견고하다, 확고하다, 신뢰하다"이다. 그러니까 아멘은 문자 그대로 “그 말이 확고합니다”, “나는 그 말 위에 서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믿고, 내 삶을 걸겠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요, “주님,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신앙의 결단이다.


"평안하세요!"라는 의미로 쓰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온전함, 통합, 조화'를 뜻한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다시 같은 숨을 쉬는 상태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6)


여기 '평강'이 바로 샬롬이다. 민수기의 제사장 축복은 기분 좋은 위로가 아니라 부서진 인간을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끌어안는 행위다. 성경적 샬롬은 삶과 존재의 균열이 치유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다. 그래서 진짜 의미는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가깝다. "당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당신의 존재가 하나님 질서 안에서 다시 하나 되기를.", "하나님의 다스림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호산나(הוֹשִׁיעָה־נָ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수많은 군중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찬송하며 외친 구원의 환호였다. 시편 118편에서 나온 히브리어인 이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절박한 기도이자 메시아 고백의 절정이었다. 이 환호성은 기쁨이지만, 뿌리는 간절함이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그때 구원이 시작된다.


2. 임재의 언어 - 오신 하나님, 머무시는 하나님


카두쉬(קָדוֹשׁ), '거룩'이라는 단어는 흔히 도덕적 의미로 소비된다. 그러나 원어인 히브리어는 "전적으로 구별되다"에 가깝다. 하나님은 조금 나은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다. 하나님의 거룩은 겁나서 피해야 하는 불이 아니라, 우리를 정화해 품에 안기게 하는 불이다. 거룩은 금욕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 19:2) 거듭난 자녀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


임마누엘(עִמָּנוּ אֵ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히브리어인 이 단어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문장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다’는 선언이며, 잃어버린 동행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복음의 첫 문장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실 것이라는 언약을 믿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아람어 마라나타(מָרַנָא תָא). "주여, 오시옵소서(Come, Lord)."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한 번 언급된다. 다른 성경에 비슷한 뜻은 나오지만, 이 단어는 아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가 예배를 끝낼 때마다 나누던 재림 소망 고백이었기 때문에 번역 없이 음성 그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박해 시대에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암호 같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과거 회상이 아니라 미래의 도래를 향한 소망이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도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히브리어 엘로힘(אֱלֹהִים)은 복수형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영적 존재 중 으뜸이며, '충만해서 넘치는' 분이다. 전능하신 분, 창조하시는 하나님(창2:4)을 나타낸다.


그리고 네 글자로만 표기되는 신비의 이름, 히브리어 야훼(YHWH)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출 3:14)”로, 존재의 근원, 시간의 근원, 의미의 근원이다. 히브리 원문은 자음만 기록(YHWH) 되었기 때문에 발음이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너무 거룩하여 발음하지 않았고, 낭독 시 아도나이(주님) 또는 엘로힘(하나님)으로 대체했다. 학자들이 2천 년의 자료를 통해 ‘야훼’로 복원했다. 즉, YHWH를 야훼로 읽는 것은 현대 학문적 재구성이다.


3. 사랑과 구원의 언어 - 복음의 심장부


‘사랑’이라는 단어는 과소비된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페(ἀγάπη)는 결이 많이 다르다.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근원적 사랑. 죄인에게 흘러간 자기희생적 사랑이며, 사랑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에게 흘러가는 사랑이다.


메시아(מָשִׁיחַ)는 예언된 구원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그 히브리어 개념을 헬라어로 번역한 표현이다. 두 단어 모두 '기름 부음 받은 구원자'라는 동일한 의미를 담는다. 메시아는 구약의 뿌리, 그리스도는 신약의 열매. 이 두 단어가 연결될 때,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가 하나로 만난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다. 이는 예수님의 직업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다.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 '말씀'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등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말씀이 살과 피를 입고, 창조주가 구세주가 되어 세상에 오신 사랑의 극치다. 개미를 살리기 위해 사람이 개미가 된 격이랄까. 그 로고스가 불러낸 공동체가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다. 헬라어로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밖으로 불러낸 공동체”,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즉, 특정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형성된 존재다. 교회는 하나님이 복음의 휘파람으로 부르신 구원받은 자녀들의 모임이다.


4. 지명에 새겨진 복음 - 공간에 기록된 하나님의 서사


지명은 단순한 지도상의 표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장소를 통해 이야기를 쓰신다.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벧엘(בֵּית־אֵל)은 야곱이 사닥다리 되신 예수님을 만난 곳이다. 잠에서 깬 그는 "여기가 하나님의 집(벧엘)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라고 고백한다. 벧엘은 하나님이 도망자를 찾아오셔서 절망의 자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바꾸신 곳이다. 인생의 바닥이 '벧엘'이 될 수 있다. '구부러진 곳', '비틀린 곳'을 의미하는 루스에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시는 순간, 그곳은 하늘의 문이 된다.


'떡집, 빵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들레헴(בֵּית־לֶחֶם).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35)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이 떡집에서 오셨다. 태어난 마을 이름이 '떡집'이라는 게 우연일까? 성경의 모든 지명은 언제나 섬세한 상징으로 채워져 있다. 겟세마네(גַּת־שְׁמָנֵי)는 히브리어로 '기름 짜는 곳, 기름 짜는 틀'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영혼이 눌리고 쥐어짜여 십자가를 향한 순종이 완성된 곳. 신약의 구원은 올리브처럼, 기름은 눌림을 통과해 흘러나온 순종의 향기다(마 26:36). 복음의 가장 깊은 기도는 화려하게 든 두 손이 아니라, 땅에 닿은 이마에서 시작된다.


골고다(גֻּלְגֹּלֶת)는 히브리어/아람어 계열의 셈어 단어로 '해골의 언덕'을 의미한다. 골고다는 해골처럼 생긴 언덕으로, 사형수들이 공개 처형된 장소였다. 골고다는 죽음의 이미지가 구원의 이미지로 완전히 뒤집힌 공간이다. 구속사는 골고다에서 절정을 이루고,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라는 십자가 마지막 메시지가 울려 퍼진 곳이다. 골고다는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문이 열린 곳이다.


5. 예수의 음성 - 번역되지 않은 능력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다음의 아람어 세 단어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말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람어는 예수 시대 사람들의 '감정의 언어', '심장의 언어'였다. 히브리어가 성전의 언어였다면, 아람어는 삶과 눈물의 언어였다.


에바다("열리라!", 막 7:34)는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을 동시에 여는 말이다.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데려와 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후 말씀하신다. "에바다." 헬라어로 번역하면 기적의 생생함이 사라진다. 예수님의 숨소리, 떨림, 기도의 무게가 담긴 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달리다굼(막 5:41)는 죽음의 방으로 들어온 생명의 언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자, 사람들은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포기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직접 잡고 말씀하신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서는 이 장면을 헬라어로 번역하지 않고 예수님의 아람어 원음 그대로 보존한다. 왜? 그 음성 자체가 기적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호출, 부활의 언어였다. 죽음의 방은 생명의 방으로 바뀌었고, 절망의 현장은 소생의 현장이 되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는 십자가의 물리적 고통보다 인류의 죄가 만들어낸 절대 고독을 드러낸다.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서 대신 경험하신 영적 단절의 절규이며, 동시에 시편 22편의 구원 완성을 여는 메시아적 선언이다.


결론 - 단어가 아니라 복음


스물한 개의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복음이 완성된다. 할렐루야로 시작해 아멘으로 닫히는 삶. 임마누엘로 시작해 마라나타로 이어지는 시간. 벧엘에서 열린 하늘이 베들레헴에서 내려오고, 겟세마네에서 눌리며, 골고다에서 터지고, 달리다굼과 에바다로 지금 이곳에서 현재형이 된다. 우리가 무심코 말하던 그 단어들은 사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남겨두신 언약의 표식이었다. 우리는 단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 속 미번역 단어들은 모두 하나의 고백으로 모인다. 하나님, 당신이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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