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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Sep 05. 2021

죽음을 생각하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

내일이 먼저 올 지, 다음 생이 먼저 올 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 티베트 속담

나는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집어 드는 소설책엔 항상 죽음이 등장했다.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덤덤했다. 어차피 사실이 아닌 이야기여서 그랬을까. 아니 그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사람은 죽으니까.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그러나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죽지 않을 듯이 살았다. 죽는다는 사실을 까무룩 잊고 영원할 것처럼 굴었다. 나뿐 아니라 엄마도, 동생도, 친구들도.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고 느낀 건 착각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쉽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냈는데ㅡ죽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건 혼자 했다ㅡ그러면 어떤 이들은 괜히 마음 아파하거나 겁을 내거나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나는 아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무사히 글을 마치고서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길에. 주위를 둘러보지 않다가 차에 치일 수도 있다. 갑자기 커다란 싱크홀이 생겨 땅과 함께 꺼질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또, 삶에서.  


죽음은 어떤 모양으로든 순식간에 내 삶을 덮쳐올 수 있다. 원래 그런 거니까, 죽음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보름이 지났다. 연락이 온 순간엔 일을 마치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다. 잠시간 놀랐고, 잠시간 서글펐고, 생각보다 담담했다. 가장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다음은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 입고 동생을 기다렸다.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있으니 나의 고양이가 다가왔다. 평소처럼 얼굴에 코언저리를 부비며 애교를 부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밖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한참. 깊은 우주를 담은 눈으로 한참을 보았다. 


상복을 입은 엄마와 삼촌, 이모들을 보아도, 고개를 한없이 떨군 채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아도, 분홍빛 고운 한복을 입고 미소 지은 채 액자 속에 갇혀 있는 할머니의 20년 전 모습을 보아도 죽음은 실감 나지 않았다. 


삼촌의 으름장 때문에 코로나 이후론 할머니 뵈러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만 사실 모두 핑계였다. 어떻게든 원하면 뵈러 갈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 집까진 1시간 남짓이었다. 버스 두 번, 지하철 한 번 타면 되는 일이었다. 


 후회해봤자 늦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벽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사촌오빠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코로나 때문에 부고 연락도 조심스러웠다. 장례식장은 자연히 썰렁했다. 새벽부터 술잔을 기울이던 사촌오빠는 기어이 취하고서야 할머니 이름을 외치며 보고 싶다고 울었다. 

 



둘째 날 오후엔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육신을 관에 넣기 전 행하는 작별의 순간이었다. 할머니의 작은 몸이 수의에 쌓여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곱게 화장을 한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큰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눈을, 코를, 입술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를 할머니 곁에 세워두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들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각자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사랑한다는 말, 걱정 말고 좋은 곳에 가라는 말, 엄마 아들 아프지 않게 해 달라는 말. 


나는 할머니의 팔을 한 번 꼬옥 쥐었다 놓았다. 탄력 없는 말랑한 팔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닿았다. 여전히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웃는 얼굴, 얄망궂은 표정으로 잔소리하는 얼굴, 세상에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라며 고통 속에서 멍해진 얼굴. 


 편해 보인다, 울 엄마. 


큰 이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관식이 치러지는 동안 할아버지와 이모부들은 어이고 어이고 곡을 했다. 할아버지는 울다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두 번 눈을 떠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눈을 감더라고, 그러더라고, 그러더니… 하고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시 곡을 했다.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영문을 몰라했다. 그녀의 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울고 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등을 토닥여주고 있을까. 주저앉은 채 차마 입관식 하는 모습도 보지 못하는 사촌오빠 앞에 쪼그린 채 앉아있을까. 그런 생각들만 했다.


할머니는 노인이 되어 죽었다. 건강한 자식들을 낳고 그 자식들이 또 자식들을 낳아서 자신보다 한참 큰 가족들이 한참이나 되었다. 모두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엔 할아버지와 이모가 곁을 지켜 주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었을까?


죽음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을까? 

그 구분은 죽음을 위한 것일까,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까? 

진짜 죽음을 떠올리는 일이 가능이나 한 일일까?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죽음을 몰랐다.


내게는 내일이 먼저 올까, 다음 생이 먼저 올까.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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