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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Aug 29. 2021

끊자는 다짐

그렇다. 술 얘기다.

페이스북에서 과거의 오늘 소식을 매일 같이 확인하던 때였다. 이미 몇 년째 오늘 수도 없이 본 사진이 떴다. 8년쯤 된 사진이던가. 동그란 단발을 한 앳된 얼굴의 내가 테이블에 팔을 얹고 검지와 중지 손가락만 펴서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고개를 기울여 브이 위로 얼굴을 기댄 채로. 하얀 남방에 촌스러운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거의 하지 않는 포즈였다. 브이도 그렇고, 애교스럽게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고. 그러나 사진의 장소와 그 순간의 상태를 가늠해보면 불가능한 모습도 아니었다. 브이 옆으로 유리병의 긴 목이 빼꼼 사진에 침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초록빛의 영롱한 유리병. 사진에 보이는 건 한 병뿐이었지만 그 뒤에 숨은 친구들이 몇이나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8년 넘게 아니, 10년도 넘게 꾸준히 해온 거라곤 술 마시는 것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어느 순간부터는 술 끊어야지, 이제 그만 마셔야지 하는 (말뿐인) 회한과 반성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술 끊는 걸 못해서 술 끊자는 말을 끊었네.


깨달음 이후에도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술을 마셨고, 취했고, 그다음 날을 시름시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끊어야지" 보다 난이도가 낮은 편인 "술 좀 줄여야지"라는 말조차 취기로도 내뱉지 않았다. 되려 하는 말이라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러고도 몇 년 뒤 잠시나마 술을 끊게 된 건 우습게도 어쩔 수 없어서였다. 스트레스로 수술대에 오른 뒤 내려진 금주령을 착실히 지켰고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서 왔던 고통이 정말 극심했으므로 더 두려웠다.) 세상에, 비웃기만 했던 무알콜 맥주를 창조하신 분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리며 꿀꺽꿀꺽 캬아, 한 달을 버텼다. 


그 후로는 와인하고 소주를 기껏해야 한 병 깔짝대기만 했는데도 침묵의 장기가 들고 일어섰다. 야, 너도 참 징하다. 그쯤 하면 됐어. 그만해, 이제. 하듯이 다시 한번 한 달, 무릎 꿇고 간과 함께 침묵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때 나와 초록병을 앞에 두고 온갖 미친 소리를 주고받았던 동지들은 그 정도면 네 간도 충분히 버틴 거다, 했다. 그들은 이미 나보다 먼저 의사에게 크게 한소리 들은 사람이거나 나보다 늦게 술을 시작한 사람이거나 나보다 술잔을 덜 꺾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준 알록달록 어여쁜 술잔을 어느 순간 눈물로만 채우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선배 J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중엔 정말 소주 한 잔도 버거워진다? 작작해."


그녀의 섬뜩했던 말과 별개로 술은 점점 줄긴 했다. 마시는 양이 줄었고 마시는 날이 줄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못 마시는 몸이 되었는데 되돌아보니 술을 마시게 하는 건 또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나이 들고 보니 딱히 술친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진짜 술은 혼술이거든. 


여전히 나는 소주와 맥주, 와인과 위스키 그리고 보드카를 사랑하긴 하지만 주체 못 할 정도로 (웬 술에 주체까지,라고 하지 말라. 예전의 나는 그랬으니까.) 갈구하지는 않는다. 


그저 어떤 저녁, 그러니까 나 스스로가 대견스럽거나 칭찬해주고 싶을 때 아니면 쪼오끔 서글픈 날에, 그것도 아니면 한 주를 정신없이 보내고 꿀 같은 주말을 맞기 전, 그것도 아니면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난 김에, 아니면… 아니면 그런 거 있잖아. 그냥 괜히 좀 센티한 날….? 


뭐 그 정도뿐이다, 술이 고픈 날은.  


참, 지금은 아주 약간, 그러니까 화이트 와인을 2/3 정도 마신 것뿐이다. 어, 음… 이번 주는 내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만났고, 쪼오끔 서글프기도 하고, 이제 곧 주말을 맞이하니까…?


앞으로도 나는 술 끊자는 다짐은 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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