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혐오를 벗어나보자
더는 안 된다. 다 입 때문에 요모양 이꼴이다. 입이 문제다. 언제나. 귀와 코나 눈이 하는 실수는 봐줄 만했다. 그것도 사실 뇌가 저지르는 잘못을 덮어쓴 것뿐이니까. 아무튼 문제는 입이었다. 항상 그랬다.
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태어날 거야. 그러려면 이 입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인류는 다 사라져야 해."
나도 노오력이란 걸 안 해본 건 아니다. 사람이 싫다고 하면 대개 그들은 상처 받은 눈을 하거나 경악하는 입을 했다. 사회화하며 문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사람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인류로 주어에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의 거부감 혹은 거북함이 덜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미친.' 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가끔씩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으나, 8할은 '미친.' 파였다. 문제는 문장에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내 사회화는 아직 진행 중에 있었다.
"아니야. 많이 바라지 않을게. 반만. 딱 반만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리하야 직장 다닐 적의 내 닉네임은 '가산 타노스'였다. 회사가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이사를 간지 두 달만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곳엔 인간들이 너어무 많았다. 인류 과포화 지역이었다. 나는 그 끔찍한 곳을 핑계로 인간을 더 미워하고 싫어했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꺄륵거리고 돌아다녀. (그들도 단지 회사 밖에 나와 잠시나마 행복한 직장인일 뿐이었는데.) 시끄럽고 못생겼어. 시끄럽고 부산스러워. 시끄럽고 시끄러워! 으악!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을 좋아하지? 어떻게? 인간을? 왜? 인류를? 어째서?! 이 사악한 존재들을?! 웩!
"사람이 왜 좋아?"
나는 격렬한 감정을 최대한 가라앉힌 뒤 자연스럽게ㅡ라는 흔한 착각으로ㅡ그들에게 물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또래에게도, 어린 사람에게도 물었다.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물었다. 수많은 시도를 해보았지만 딱히 내 마음에 드는 대답은 없었다. 그들의 대답은 대충 이러했다.
사람 좋아하는 사람 1 : "그냥 뭐, 재밌으니까."
사람 좋아하는 사람 2 : "훔... 걍 좋은데여?"
사람 좋아하는 사람 3 : "나는 너만 좋아해." / 특징 : 실없음
사람 좋아하는 사람 4 :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 제가 그렇게 칠렐레 팔렐레 사람 좋다고 쫓아다니진 않거든요?" / 특징 : 놀자고 하면 세상 칠렐레 팔렐레 쫓아 나옴
사람 좋아하는 사람 5 : "너는 왜 사람이 싫냐?"
사람 좋아하는 사람 6 : "사람이 준 상처도 결국 사람이 치유하는 거야." / 특징 : 교회 다님
"그럼 하느님은 하는 게 뭐예요?"
"하느님은 다만 용서할 뿐."
아아,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참 싫었다.
최근에 알게 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7은 그랬다.
“사람들 불쌍해~ 남한테 못되게 구는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야.”
“그건 그렇죠.”
“그치, 나는 사람들 불쌍해서 안타까워. 싫다가도 싫어할 수 없어.”
“…”
“그러니까 사람 너무 싫어하지 말아봐 봐.”
“저는 동물이 더 불쌍해요! 사람 싫어!”
“에휴.”
한 번은 한 마디로 '인간댕댕이' 같던 사람 좋아하는 사람 8에게 또 한 번 인류필멸설을 간략히ㅡ열렬히 하고 싶지만 '미친.' 하는 눈빛을 받지 않기 위해 자제함ㅡ토로하던 중이었다.
"인간은 다 죽어야 돼."
"헉... (정말 입으로 헉 소리를 냈음) 저는... 저만이라도 살려주시면 안 돼요?"
나는 그 아이가 귀여워서 마스크 속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괜히 비장하고 냉정하게 굴었다.
"내가 죽인다곤 안 했는데. 그치만 너도 죽을 운명이야."
"허어어엉."
"혼자 살아서 뭐해? 다 죽고 혼자 살면?"
"그래두우..."
그 아이는 그냥 맥 빠진 말장난에 적당히 대꾸해준 것뿐이었지만, 나는 그때 그 아이에게 되물으면서 무언가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물론 나는 가장 먼저 죽는 인간 중 하나이고 싶었다. 타노스에게 내려진 가장 고통스러운 형별은 사랑하던 딸의 죽음보다 그 자신이 살아남은 것 그 자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사람 좋아하는 교회쟁이의 말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결국 상처 받고 안 운 척하며 웅크리고 있을 때 나를 토닥여준 게 결국은 또 다른 인간이었을 때, 내게도 비극은 가장 가까운 실재(實在)가 되었다.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인간,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 불화를 조장하며 즐기는 인간, 자신의 것은 맹목적으로 지키면서 남의 것은 서슴지 않고 파괴하는 인간, 쥐꼬리만 한 권위로 사람들을 줄 세우려는 인간, 우월감에서 불거져 나온 열등감으로 남을 꺾으려는 인간.
나는 그들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그들이 내게 그러는 것도 문제였지만, 내 눈에 보이는 다른 이들한테 하는 짓까지 괴로웠다. 나의 인간 혐오는 모순적이게도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웅크린 나를 일으켜 세운 손도 그랬다. 그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연민이었고, 사랑이었고, 용기였다. 나는 뻔하다고 여겼던 말들에 파묻혀서 잊고, 잃고, 얻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게 끝없이 끔찍한 인간들이 들러붙은 이유를. 지금도 틈만 나면 코너에서 튀어나올 준비를 하는 그 징글징글한 것들이 모두 내 입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재앙이었음을.
말은 실체가 되니까. 자꾸 싫어한다고 내뱉으면 정말 싫은 게 되어버리니까.
"사람 싫어. 사람이 너무너무 싫어. 사람은 너무너무 끔찍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자꾸자꾸, 자꾸자꾸자꾸 싫고 끔찍했다. 내게 오는 사람들은. 내 눈에 스치는 사람들은. 내 귀에 들려오는 사람들은.
분명 가까운 곳엔 선뜻 자신의 품을 내어준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나는 먼 곳만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의 말은 그들에게 가닿지 않은 채 주위를 맴돌았다. 상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좋아하는 죄로 대신 받았다. 결국 또다시 사람들의 말들로 내 시선은 겨우 망원 렌즈에서 벗어났다. 나를 어루만져주는 손길로 돌아왔다. 인간은 못됐지만 나는 비겁했구나 깨달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용기다. 나는 힘겹게 끄덕이며 그들을 뿌리치고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불러와야겠다 결심한다. 그러니까 입부터 해결해야지. 사람 좋다고. 사람은 너무 아름다운 존재라고. 사람이 좋아서 미치겠다고. 얘기해봐야지.
음… 쉽지 않으니까. 손가락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려 보내야겠다.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사람이 좋다. 사람이 너무너무 좋다. 인간은 아름답다. 아름다워. 인류가 다 함께 행복하게… 아… 좋다. 좋아. 좋…같구나.”
아아,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