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나무 Oct 23. 2021

지하철에서, 럭키포인트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점심 즈음 퇴근을 했다. 회사 다닐 때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이었다. 평일 오후의 지하철은 고요하고 여유로왔다. 빈 자리 사이사이를 메운 사람들의 표정도 한껏 평화로왔다. 그 시간의 열차에는 젊은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노인의 비중이 높았다. 때문에 더욱 낯선 풍경이었다.


풍족한 빈 좌석 덕분에 노인들도 열차 가장자리가 아닌 중앙에서 당당히 자리를 골라 앉았다. 가끔은 허름한 옷을 두텁게 껴입고 홀로 두 좌석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노인도 있었다. 그런 노인 옆에는 한 두 칸이 더 비어 있기도 했다.


빈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내가 탄 열차에는 좌석 양끝 말고도 중간 중간 안전봉이 있었다. 어차피 의자는 길게 난 하나의 몸이었지만 안전봉 양옆으로 분리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른편에 봉을 둔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순간 나의 하얀 책장 위로 검고 긴 암막이 드리웠다. 놀라긴 했지만 지하철은 원래 그런 예상치 못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고개를 들어 검은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팔이었다. 내 오른편에 있는 안전봉을 잡고 내 왼편에 앉으려는 노인의 팔 말이다. 


그는 그렇게 안전봉에 몸을 의지한 채로ㅡ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너무 빠르게 쏟아져 엉덩방아라도 찧을 것처럼ㅡ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내 책장을 덮은 검은 그림자도 그가 앉는 속도만큼 느긋하게 내 눈 앞을 머물렀다. 그가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 엉덩이를 안전히 붙이고 나서야 다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 정거장 만에 돌아온 그림자로 내 독서는 몇 페이지만에 다시 가로막혔다. 차라리 손을 잡아 드릴까, 생각을 하다 금세 물렀다. 나는 예민한 만큼 소심했고, 소심한 만큼 생각이 많았다. 그 손길은 어쩌면 침묵보다 못할 거였다. 선의보다 오지랖에 가까운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큰 무리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성급한 동정 따위는 필요 없을 터였다.


소리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곧 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우지끈, 그렇게 내 발이 밟혔다. 그의 팔이 시야를 떠나는 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 발은 결코 통행에 방해가 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요가하듯 무릎 아래 발목, 일직선으로, 놓여있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다. 굳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진 않았다. 사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너무 무심했다. 발을 밟힌 게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는 태연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저 원래의 목적대로 출입문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그래도 사과 한 마디 정도 했음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 다시 책에 눈을 두었다. 조금 억울하고 뾰쪽한 기분이 되기도 했으나, 금세 잊을 만한 일이었다. 


그가 떠난 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아주머니라 하기엔 작고 할머니라 하기엔 걸음이 씩씩한 노인이었다.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도 않고 당장 달려나갈 사람처럼 엉덩이만 살짝 걸터 앉았다. 팔은 힘 없이 양 허벅지 위로 무심히 얹혀 있었다. 스마트폰에 고정된 시선들과 달리 그녀는 안내판과 차창 밖 흘러가는 어둠을, 그리고 열차 안에 있는 몇되지 않는 사람들을 꼼꼼히 그리고 조심스레 훑었다. 


그녀 역시 몇 정거장 만에 엉덩이를 뗐다. 우지끈, 다시 한 번 발을 밟혔다. 나의 발은 아까의 요가 자세보다 더욱 안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발이 밟히자 마자 눈을 감고 공기처럼 빠져나오는 웃음을 짧게 흘렸다. 불쾌한 감정도 없었다. 그저 상황이 우스워서 툭 튀어나온 자조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아이고 미안. 미안해요.” 하고 거듭 사과를 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작게 괜찮아요, 했다. 그래도 이번엔 사과를 받았네, 생각하며.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 같아 책을 덮고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열린 문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발 두 번 밟힌 것쯤이야 정말 별 것도 아니었다. 아니,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이었다면 기분이 아주 나빴을 것도 같았다. 사과조차 못 받았다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상식도 없는 무개념 악인으로 치부하며 저주까지 내렸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지하철은 서로 간의 소리없는 흑마법을 주고 받는 슬리데린 같기도 하다.) 


문득 요즘 보는 웹툰이 생각났다. 그 웹툰 속에서는 일상의 모든 사건들이 럭키포인트로 적립되거나 차감된다. 마치 게임의 이벤트같은 것이다. 운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심각성 만큼 포인트가 적립되고, 운 좋은 일이 생기면 포인트가 차감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운 나쁜 일이 쌓인 만큼 한번에 커다란 행운으로 바뀔 수도 있는 거였다. 


오늘 아주 쏠쏠한 럭키포인트를 얻었네, 생각했다. 


미소를 짓다가 문득 나의 발을 밟고 간 노인들의 하루가 궁금해 졌다. 그들은 어딜 가는 길이었을까. 몇 정거장도 가지 않고 내리는 걸 보면 동네 산책을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 걸까. 


노인들은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다닐까.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궁금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걷고 앉는 게 힘들어서 무언가에 몸을 맡기고 지탱해야 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릴 곳을 놓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등을 기대고 편히 앉지도 못하는 마음은 뭘까. 유독 조용하고 조심스럽던 그 노인들은 평소엔 노약자석에만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을 테지. 


내 발을 밟았다는 죄로 그들의 포인트가 차감되는 건 아니겠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운이 나쁜 일이었으니까. 의도치도 않게 괜한 발을 밟았으니 말이야. 


나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쏠쏠한 포인트가 쌓였음 좋겠다. 아주 작은 포인트들이 모여 커다란 기쁨으로 출금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우산 정도를 잃어버리는 작은 불행으로 적립하고, 보다 커다란 행복으로 소진되기를. 


쓰고 보니 그들의 행복을 상상하는 일조차 그들의 목적지를 그려보는 일만큼이나 까마득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꾸 어긋나는 대화 속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