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100일 앞두고
올해의 끝을 바라보며 목표를 하나 세웠다. 어쩌면 다가오는 새해 버킷리스트 가장 상단에 쓰이게 될 단 두 글자. 퇴사.
다섯 번째 퇴사를 준비합니다.
어느덧 돌아보니 직장생활도 7년이 넘었다. 스스로를 조직생활에 안 맞는 사람으로 분류하는 것치곤 착실하게 출근하고 퇴근하고 월급을 받아 왔다. 물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3개월 만에 뛰쳐나온 첫 회사와 3년 반을 몸담았던 두 번째 회사. 이후 2년은 회사를 두 번 옮겨 다녔다. 이제 다섯 번째. 이곳에서도 겨우 2년을 앞둔 지금, 나는 또 한 번의 퇴사를 준비한다.
어차피 사직서에는 ‘일신상의 사유’ 외에 다른 말은 일절 쓰이지 않을 것이다. 굳이 쓰고자 한다면 입사 두 달째, 사수의 손을 떠난 각티슈가 내 팔에 명중했던 날부터 시작일 것이다. 아니 그전에 욕하고 윽박지르던 것부터 시작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첫 면접부터 종용된 아주 사소한 거짓말부터일지 모른다.
사수의 욕설과 고함은 6개월 간 계속됐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업무에서 배제했다가 일을 잔뜩 떠넘기길 반복했다. 결국 프로젝트는 엉망이 된 채로 끝이 났고, 모든 뒤처리는 내 몫이었다. 겨우 사수한테 벗어났더니 새로 팀장이 왔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였다. 경력이 긴 만큼 배울 것도 많겠다는 생각에 다시금 희망이 생겼다. 밤늦은 시간 카톡에 빨간 알람이 뜨기 전까지는.
팀장은 함께 일하는 동료로 특별했고, 자기 딴엔 예쁜 후배였고 어쩌고를 시전 했다. 6개월 간 밤늦은 시간이든, 연차 날이든 잊을 만하면 보고 싶다는 둥, 섭섭하다는 둥 다시 기억하기도 끔찍한 메시지를 그만 보내달라고 겨우 말한 참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진작 말하지 그랬어, 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 이후 업무와 상관없는 트집과 시비가 시작되었고, 나는 결국 두 번째로 대표실 문을 두들겼다.
결국 어떻게 됐냐고?
위에 써놓았듯 사수와 팀장은 아무런 처벌받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한 지금, 나는 기어코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사수를 향한 원망, 팀장에 대한 분노, 회사에 대한 불만에 끓어오르다 문득 깨달았다. 나의 목을 조르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괴물의 실체는 그저 내 감정 그 자체였다는 것을.
그 시간들은 지났다. 사수는 사과 한 마디 없이 떠났고, 팀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회사 구석구석 잘도 누비고 다닌다. 대표님은 나를 다른 부서에 옮겨 놓고 아무런 지원 없이 프로젝트를 성공해내길 바랐다.
퇴사 전문 간행물 <월간 퇴사> 제1호에 그런 말이 나온다. 내가 하는 일이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 그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낄 때가 바로 퇴사할 때라고.
부서 이동 후 6개월 간 내게 맡겨진 일은 단 한순간도 멈춰 있던 적이 없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휘저어야 했다.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영법으로.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앞을 향해 발을 구르는데 몸은 나아갈 기미가 안 보였다. 마치 내가 헤엄치고 있는 수영장 전체가 뒤로 작동하는 러닝머신이라도 된 것 같았다.
몇 개월을 지켜보다 결국 대표실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회사에서도 아무 레퍼런스 없는 분야의 프로젝트였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적어도 전문가 한 둘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면 회사에서도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는 이야기였다. 대화는 30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왜 환경에 불만을 갖느냐, 그냥 묵묵히 적응하는 게 네 몫이다, 라는 게 답이었다. 일만 하지 말고 정치도 잘 해내야 한다는 추신도 덧붙였다.
문을 닫고 나오며 오히려 안도했다. 드디어 받았다. 답이 명확해졌다. 나는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고작 제자리에라도 남아 있기 위해 발을 구르는데 상황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받은 것이다.
나는 이 회사를 떠날 것이다. 누구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훌훌 떠나갈 것이다. 모든 게 끔찍하고 괴로워서가 아니라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떠난다. 나의 길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어디로 도달하게 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곳과 다른 방향인 것만은 확실히 알았으므로.
앞으로 100일. 예비 퇴사자는 별책부록을 준비한다. 사직서 한 장, 단 한 문장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일신상의 사유’를 이곳에 적어 내려가고자 한다. 나의 2년, 짧지만 지난했던 시간 안에서 고군분투하던 나를 위해. 지금 이 순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수많은 퇴사 지망생들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퇴사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