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의 시작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입사 일주일째 퇴사를 선고한 나에게 사수는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할 테니 최대한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과 즐겁게 일 해보자 권유했었다. 그러나 업무 조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개 팀장과 팀원인 K와 올빼미 모두 조금이라도 귀찮은 일은 나에게 부탁했다. 심지어 사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방과 후 숙제를 내주고 결과물을 돌려보며 평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썼지만 아직 부족하다, 라는 피드백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나는 술자리에 쫓아가야 했다. 선배 노릇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K는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그냥 시킨 일을 묵묵히 하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먹는 게 내 평가 점수가 되었다.
미안합니다. 상황이 따라주질 않네요.
그래도 일은 점점 늘고 있는 게 보이는데... 우리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난 새벽나무님과 일하는 게 즐거운데.
사수는 팀장과 팀원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일단 퇴사는 막아야 하니 아무 말이나 둘러댄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는 내게 그는 사과 한 마디 빠르게 내뱉은 뒤 내 칭찬을 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기가 찼지만 어디 다른 곳에 한탄할 수도 없었다. 회사에는 이미 사수와 내가 일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해놓은 참이었다. 게다가 팀웍이라곤 없고 꼰대들만 있어서 싫다는 소리는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네 명에게서 떨어진 각기 다른 일들을 해치우느라 하루가 쏜살같이 흘렀다. 야근만큼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나는 화장실 갈 때를 빼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일했다. 점심시간에라도 혼자이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팀원들은 나눌 화제도 없으면서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때 훈련한 덕분에 지금도 나는 멍 때린 채로 빠르게 밥그릇을 비울 수 있다.
어느 날은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액정에 뜬 건 사수의 이름이었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 그의 자리를 보았다. 모니터가 꺼진 채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복도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잠시 근처 카페로 올 수 있냐고 물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네 시가 다 돼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외투를 챙겨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가니 상기된 표정의 사수 앞에 레몬차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얼굴에 물음표 가득한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내게 앉아서 차를 마시라고 권했다. 항상 쓰디쓴 커피만 마시는 내게 레몬차는 난제였다. 게다가 신 걸 유난히 못 먹어서 더 괴로웠다. 사수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레몬차가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라고 했다. 딴엔 배려였는데 몰라주는 나를 탓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웃으며 레몬차를 한 모금씩 맛봤다. 어쩐지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레몬차와 씨름하고 있는 내 앞에 두툼한 무언가가 툭 하고 놓였다. 포장지에 싸여 있었지만 책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한 손짓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책을 선물 받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했고 그래서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책을 선물할 수도, 선물 받을 수도 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참이었다. 그는 내게 두 권의 책을 선물했다. 하나는 업무와 관련된 책이었고, 하나는 그가 면접 때 내게 꼬치꼬치 물었던 분야의 경제 서적이었다.
사수는 자신이 잘 이끌어줄 테니 일도, 경제 공부도 함께 해보자고 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책을 안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어느 누가 회사에서 만난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해준단 말인가. 직전 회사에서 악질의 경영진들을 겪고 난 뒤의 보상이구나, 생각했다. 내게도 새로운 길이 열리는구나.
뭐, 확실히 전에 없던 새로운 길이긴 했다.
다시 카페로 돌아가 보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사수에게 물었다. 서점에 다녀오신 거냐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2시쯤 팀원 K가 나를 툭툭 치고 사수 못 봤냐고 묻던 장면이 떠올랐다. 책을 덮고 있던 포장지에 적힌 서점 이름을 바라보았다. 회사에서 편도 40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아마 자료 수집차 다녀온 것일 거라고, 업무와 관계된 일이니 업무시간에 갔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수의 자료수집 기행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덩달아 내게 떨어진 일감은 그만큼 늘어났다. 점심을 다 먹고 팀원들이 담배 피우는 사이 사라진 그는 4시쯤 다시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 행위가 너무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라 나는 의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회사 문화가 그런 것이려니 싶었다. 이윽고 그가 빠진 점심식사 테이블에서 K와 올빼미가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는 걸까’ 라며 비웃음 섞인 질문을 주고받기 전까지는.
사수의 행적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물개 팀장도 종종 독방에서 나와 묻곤 했다. 그들은 사수와 친분이 있는ㅡ있다고 오해하는ㅡ나에게 물음표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나는 알 수 없었으므로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마 그 행동이 문제였는지 그는 어느 날 대뜸 나를 불러냈다. 앞으로 자신이 자릴 비운 시간에 누군가 물어오면 대충 외근이나 영업 미팅을 나갔다고 둘러대라고 했다. 먼저 말을 꺼내기에 마침 잘됐다 싶었다. 나도 궁금하던 터였다. 도대체 어딜 다니시는 거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어색한 듯 웃으며 “에이 우리 사업해야지. 지금 회사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라며 나를 자신이 짜고 있는 빅 픽처의 공범 취급했다.
나는 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이제는 물개 팀장과 팀원들의 질문에 어깨 으쓱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차라리 사수가 변명거리라도 쥐어 줬으면 착실히 입력된 그 값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으면 됐을 텐데 그는 그저 내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들기기만 했다. 결국 내 첫 번째 아침 일과는 오늘의 운세처럼 ‘오늘의 자리비움 사유 한 줄’을 지어내는 게 되었다.
나는 거짓말을 잘한다. 어렸을 적 당장 눈앞에 도래한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생존용 거짓말을 지어내길 몇 번, 나는 내가 거짓말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마피아 게임만 하면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밤만 되면 고개를 드는 나를 보며 지난밤의 희생자들이 비명을 꺅꺅 질렀다. 처음엔 우쭐했다. 내 말 한 마디면 언제나 사실이 아닌 게 사실이 되는 듯했다.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믿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러다 금세 질렸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거짓말을 지어내고 내뱉은 뒤 속은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게 전혀 즐겁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남은 내가 거짓말을 하든 말든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내 거짓말에 속아 상처 받는 건 나 혼자뿐이었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건 그만큼 의심 살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피아 게임은 한두 번 이기고 나면 세 번째부터는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다.
직장생활에서는 죄책감 없이 내뱉을 수 있는 거짓말이 있긴 하다. 사직서의 ‘일신상의 사유’나 휴가신청서의 ‘개인 사정’ 정도가 그렇다. 뭐 사실 거짓말이라고 할 순 없는 축약어 같은 거지만.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당일 아침 쓰는 휴가도 침대 안에서의 꿀 같은 휴식을 생각하면 잠깐의 불편함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달랐다. 점심만 먹고 나면 사라지는 사수를 변명하기 위한 거짓말은 나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맘만 먹으면 완벽한 거짓말을 꾸며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매번 허술하게 둘러댔다. 속으론 물개 팀장이든 K든 올빼미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구멍이 뻥뻥 뚫린 답안지를 받아 가면서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확인차 물어보는 것이다. 그들은 사수의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 함구했다.
그런 건가 싶었다. 그런 조직인 건가. 서로를 고깝게 여기면서ㅡ심지어 그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이 웃음으로 무마하고,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필요할 때 패로 이용하기 위해 가만히 지켜보는 그런, 조직.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사수는 고마운 사람이었으므로 경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팀원들이 자꾸 의심하는 것 같다고 둘러말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당장 자신의 행동이 저지당하거나 방해받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서 어릴 적 내 모습을 보았다. 마피아는 결국 시민한테 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동시에 그의 말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계속 허술한 거짓말만 반복했다. 끊은 지 오래된 거짓말을 자꾸 피워야 했다. 사회생활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사수는 동시에 나와 한 약속도 자주 어겼다. 함께 공부를 하기로 한 날을 자꾸 미뤘다. 내 탓이었다. 내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처음 펴보는 경제서적을 겨우 소화하고 있었고, 그의 도움을 원했다. 같이 공부하자고 먼저 권유한 게 그였으므로 당연히 선생 노릇을 해줄 거라 여겼다. 사수는 내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스스로 깨우쳐내길 바랐다. 모든 게 다 내 열정과 끈기가 부족한 탓이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사수는 내 질문을 한심해했다. 스스로 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겨우 졸라서 퇴근 후 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남의 시간은 당연히 내 것보다 얻기 힘들었다. 무보수로 시간을 내주는 그에게 그 어떠한 불평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사수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걸 위해서는 시답잖은 거짓말도, 나로 향하는 온갖 꾸중과 질책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그저 그가 바라는 걸 온전히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죄스러웠을 뿐이다.
결국 공부는 한 달 남짓 미루고 미뤄 다섯 번도 채우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당연히 내가 공부할 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그걸 증명해 보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일이라도 잘 배워보고자 했다. 공부는 나 혼자 하면 된다. 일에 있어서는 사수가 더 간절했다.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많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거짓말을 계속하면서라도 그에게 일감을 받아 내야 했다.
다행히 나는 빠르게 일을 배워나갔다. 하던 분야랑 달라 삐끗하던 것도 금세 감을 잡았다. 연차가 괜히 쌓인 건 아니었다. 패턴을 익히니 일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사수는 칭찬과 함께 부족한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줬다. 확실히 공부할 때와는 달랐다. 그는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에 있어서는 친절했다. 문제는 내가 너무 빨리 익힌다는 것에 있었다. 어느새부턴가 사수가 경계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예민하게 굴기 시작했다. 작은 실수 하나 발견하면 그게 다 내가 진심으로 일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며, 그딴 정신으로 일할 거면 그만두라고 했다. 보고서도 아니고 리서치 단계에서 단어 하나 오타 낸 게 문제였다.
일에도 공부에도 진심이 아닌 나는 사수의 성에 차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나를 되려 비꼬기도 했다. 그는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고, 자신의 제멋대로인 행동 역시 나 때문에, 혹은 나를 위해 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상한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의 나는 모든 게 그저 송구했다. 진짜 내 잘못이라고 여겼다. 자꾸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도 내 성격이 못나서라고 생각했다. 자존심 같은 건 버려야지, 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덫에 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