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서막
입사 일주일 만에 찾아온 탈출의 기회를 놓치고, 사수가 설치해놓은 가스라이팅 덫에 걸리고만 나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마음만 먹으면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사수를 화나게 만드는 모든 건 다 내 역량이 부족하고, 태도가 나쁘고, 의욕이 없어서였다. 도망치고 싶다, 생각하다가도 금세 죄책감이 들었다. 스스로가 못나 보였고, 한심했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매 순간 사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자리에서 짜증 섞인 한숨소리가 내뱉어질 때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심장을 졸였고, 회의 중 업무 보고를 받던 사수가 미간만 찌푸려도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는 출근하는 그의 발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스라이팅은 가랑비에 옷 젖듯 은근하게 스며드는 무언가였다.
그건 본래의 내 성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원래도 외향적이거나 활발한 타입은 아니었으나, 상사나 윗사람에게 꿀리거나 위축되는 스타일 역시 아니었다. 신입시절엔 선배들의 짓궂은 장난을 맞받아치거나 꼰대질을 지적하며 입사 한 달만에 '비글'이라는 변명을 얻었다. 지금도 여전히 친하게 지내는 선배는 그 시절 나를 '직장의 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몇몇 상사나 동료들은 그런 나를 불편해했으나, 대개는 자신의 앞에서도 쫄지 않고 할 말하는 나를 좋게 봐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복이 많은 편이었다.
그랬던 나는 사수를 만난 뒤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퇴근하면서 매일 낯선 감정과 생각을 곱씹었다. 그러다 이전 직장 동료들이 떠올랐다. 상사에게 대놓고 무시와 갑질을 당하면서도 한 마디 못하고 매일 울기만 했다는 고구마1과 교수님이 언제 어디서든 손만 펼치면 그때그때 필요한 걸 캐치해 펜이고, 커피고, 간식이고 손에 쥐어주어야 했다는 고구마2. 그리고 그들 앞에서 사이다를 달라며 답답함에 가슴을 쳤던 내 모습까지.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의 내가 과거 그들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을.
나는 내가 그렇게나 답답해했던 그들의 과거에 갇혀 있었다.
고구마3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저녁, 사수가 또 사소한 실수를 트집 잡아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다.
"여긴 핵심과제라고 돼있는데 왜 핵심전략 칸에 썼어요? 일하기 싫어요?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세요.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다른 곳 알아보든가."
더 이상 고구마로 살 수 없었던 나는 사수의 말을 흘려들으며 의자에 기대앉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꾸 없이 인상을 찌푸린 채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사수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사이다를 부어 말아. 깊은 고뇌에 빠진 나를 두고 그는 결국 흥분했고, 실책하고 말았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나약한 내면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딴 태도로 굴지 말란 말이야. 감히 내 앞에서.
가관이었다.
나는 그동안 지켜본 사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피드백을 주고 언제나 확신에 찬 어조로 일에 대한 가치관을 설파하던 그의 자신감 있는 태도는 내가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회의 중에 뜬금없이 스티브 잡스나 나심 탈레브의 명언을 늘어놓고선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된 듯 ‘멋있었죠?’라고 묻던 모습도 떠올랐다. 가끔은 낯간지러울 정도였지만, 그만큼 자존감이 높고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자신의 위태롭고 나약한 내면을 숨기기 위해 항상 스스로를 포장하고 꾸며내기 바쁜 사람이었다. 그것을 위해 남을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데에도 익숙했다. 내게 수도 없이 시도한ㅡ아니 이미 나를 옭아맨ㅡ교묘한 가스라이팅의 출처였다.
사수가 애써서 쌓아온 자신의 이미지는,
그리고 내가 두 달간 붙들고 있던ㅡ사실은 착각뿐이었던 희망은 단 한 마디로 쉽게도 무너졌다.
사수의 폭언 세례는 30분 간 계속됐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지도 못한 듯했다. 입을 열면 비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사이다도, 비웃음도 입에만 머금은 채로 말을 아꼈다. 어쨌든 실수는 실수였고, 잘못은 잘못이었다. 사이다를 붓기엔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가 우스운 것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사수는 말없이 앉아 있는 나를 앞에 두고 화를 내다가 천천히 홀로 진정되어갔다. 멋쩍은 미소까지 지었다. 맥락을 파괴하는 그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 쳐다보았더니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순순히 따라가 그가 (회삿돈으로) 사주는 순대국밥을 먹었다. 사수는 되도 않는 농담을 시도하거나 시답잖게 말을 걸며 자꾸 내 눈치를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해하며 밥을 밀어 넣었다. 순대국밥이 맛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숟갈을 뜨고 후후 불고 입에 넣는 숭고한 과정에 집중하며 사수의 어떠한 시도에도 아무런 대꾸하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그렇게 일방적인 소음과 일방적인 침묵 속에서 끝이 났다. 나는 그의 배웅을 받으며 지하철 역사로 도망치듯 뛰어내려 갔다.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 내려갈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음 날, 여전히 결론을 짓지 못한 채로 출근하던 중 사수에게서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그는 다짜고짜 사과를 했다. 내게 시도했던 코칭 방식이 틀렸음을 시인하곤 변명처럼 자신이 배워온 방식이었다고 덧붙였다. 항상 윽박지르고 폭언하는 상사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죄송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나한테도 그랬다고. 원래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그럴싸한 반성이었다. 사수와 반대로 나는 무언가 배울 때 누군가에게 혼이 난 경험이 없었다. 애초에 그게 최선의 방법도 아닌 것 같았다. 일이든 공부든 스스로 깨우쳐서 하지 않으면 결과는 빛을 발하지 못한다. 깨우침에는 자신의 손에 매를 쥔 스승이 아니라 내 손에 무기를 쥐어주는 스승이 필요하다. 싸움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사수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의 진심 어린 (줄 알았던) 사과와 안타까운 과거 서사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반쯤 열린 사이다의 뚜껑을 다시 돌렸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나 역시 전날의 태도를 사과했다. 나는 괜히 대인배처럼 굴며 사수를 어르듯이 말을 덧붙였다. 일 자체만으로도 버겁고 힘든데 최대한 즐겁게 일하고 싶다고. 스스로 인정했으니 고쳐달라고. 나도 내 태도를 고치겠다고.
내 나름대론 그게 사이다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뚜껑을 연 순간 이미 김은 다 빠져나간 뒤였는데.
그래도 나는 무엇보다 사수가 스스로의 잘못을 먼저 시인했다는 점에서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게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고 술에서 깬 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주폭 남편들의 전형적인 패턴임을 내가 알 리 없었다.
그 이후에도 사수와 나는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며 일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를 주장했다. 그는 거의 매번 내 주장을 깎아내리며 반대했으나, 논쟁 끝에 이성이 돌아오면 결국 내 방식을 택할 때가 많았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어쨌든 일방적으로 혼이 나거나 부정당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정당하게 내 주장을 갖고 싸우고 있었다. 더 이상 약자가 아니었다(고 착각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가 실체를 드러냈다.
새로운 제안서 작업 착수를 위한 회의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와 사수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사실 대립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수는 내가 제안서 전체를 혼자 쓰길 바랐고, 나는 그게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아마 그는 여느 직장 상사가 그렇듯 '시키면 그냥 할 것이지'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저 혼자 이걸 다 하란 말씀이세요?'라는 나의 반박은 그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하극상이었을 것이다.
잠시 아무 말 없던 사수는 회의실에서 보자며 먼저 자리를 떴다. 이전 같았으면 또 땀나는 손을 쥐며 숨을 골랐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나는 바로 펜과 노트를 들고 그를 쫓아갔다. 긴 회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는 내가 들어오자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화가 났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수는 항상 화내기 전에 입을 다물고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살면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퓨즈가 나간다’라는 표현이 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뭐가 불만이에요?"
사수가 물었다.
"불만이라는 게 아니라 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용도 그렇고, 제안서 작성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방식이 아예 다르니ㄲ..."
나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사수가 뭐라 윽박지르며 내던진 각티슈에 맞았다. 내용물이 거의 없던 각티슈는 가볍게 내 오른팔을 툭 치고 떨어졌다. 바로 그를 쳐다봤다. 눈빛에서 당황하는 낌새가 보였다. 위협용으로 던지려던 걸 실수로 맞힌 듯했다. 어이없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곧 눈빛을 재정비했다. 당황하지 않은 척 계속 화를 내겠다는 다짐이 엿보였다.
나는 전의를 상실한 채 의자에 기대앉아 사수의 말과 행동을 그냥 듣고, 지켜보았다. 폭언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금세 지루해졌다. 그의 오른쪽 뒤켠에 나있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봄이 온 모양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나무들이 살랑살랑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다. 이 좋은 날 나는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 걸까. 멍해진 채로 나는 다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점차 화가 가라앉으며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사수는 일어나더니 내 뒤에 떨어진 각티슈를 주워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악담을 퍼붓고 있었으나, 어조는 점점 차분해져 갔다. 각티슈를 제자리에 놓고 깊고 떨리는 숨을 몇 차례 쉰 그는 갑자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사수가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많이 놀랐죠? 미안합니다.
이거,
보통 또라이가 아니네.
나는 봄날의 풍경 속에서 미뤄 온 결말을 찾은 뒤였다. 소름 돋은 팔을 문질렀다. 침착해야지. 말리지 말자.
"괜찮아요. 그냥, 이쯤에서 그만하죠."
나는 사수의 멋쩍은 미소에 썩은 미소로 답하며 말했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얼른 자리로 돌아가 사직서를 써야 했다. 사수는 당황한 듯 되도 않는 변명을 내뱉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짧은 사이 열 번도 더 반복되고 있었다. 됐다고, 사과하지 말라고, 그냥 가겠다고 하는 나를 그는 자꾸 붙잡았다.
"대표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게요. 그냥 개인 사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약속해요."
불안해하는 것 같길래 말을 둘러댔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탈출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 좋은 경험이었다 여기고 나갈 생각이었다. 얘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을 듯했다. 대표님한테 좋게 찍혔다고 해도 나는 고작 입사한 지 두 달된 팀의 막내 직원이었다. 나는 사이다병을 놓친 고구마3 답게 침묵의 미학을 택하기로 했다. 2019년 4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기까지 3개월이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잠시 흥분했어요. 사과할게요. 그만두는 건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죠. 괜히 그러지 마시고.”
사수는 그 와중에도 그만두겠다는 내 결정을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판단으로 여기며 비꼬았다.
“이미 충분히 많이 생각한 결과라서요. 말씀 감사합니다. 나가볼게요.”
아주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수에겐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후로 30분을 더 회의실에 갇혀 있었다. 그는 내 결정이 바뀌기 전에 나를 내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자꾸 사과하고, 자꾸 말을 걸고, 질문을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 얘기를 하려 했다. 나는 각티슈를 들어 보이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사수는 실수였다며 절대 맞히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는 실수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끝이 없는 입씨름에 결국 나는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자리를 벗어났다. 사수는 식당까지 쫓아와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매운 국수를 말아먹는 나를 괴롭혔다. 매운맛으로 뇌를 마비시켜 보았으나, 나는 결국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장장 3시간을 카세트테이프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미안해요.
한 번만 봐주면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 일도 절대 그렇게 시키지 않을게요.
그냥 한 번만 날 믿고 다시 잘해봅시다, 우리.
대사가 익숙하다고? 말했잖나.
술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고 술에서 깨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주폭남편의 전형적 클리셰라고.
클리셰는 다음 장면도 뻔하게 만든다.
왜 그런 말도 있잖나.
한 번도 안 때린 자는 있어도 한 번만 때린 자는 없다, 같은.
나의 지옥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