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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Aug 30. 2024

“한 번 젖으면 물은 무섭지 않아.”


어느 주말에 후배 가족을 우리 집에 초대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아파트에서 개방하는 물놀이터에서 자녀들과 함께 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집순이에다가 물놀이도, 다른 그 어떤 액티비티도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혹은 남편과 카페에 가서 커피만 마셔도 야외활동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물놀이터에 가는 것은 나름 큰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까지 필요한 일인가 싶지만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를 불편해하고 활동적이지 않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시간이다. 우선 다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님들 틈에서 우리 아이를 보호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 또한 어디선가 날아오는 물줄기와 공중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촉각과 청각에 과도하고 급작스러운 자극은 날 불편하게 하지만 내가 불편하면 아이에게도 즐거운 시간을 보장할 수 없으니 이날만큼은 주변의 자극에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로디도 나처럼 소음을 싫어하고 예상치 못한 터치에 민감하다. 어른인 나는 복작복작한 물놀이터에서 나를 불편하게 할 많은 상황들을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지만 로디는 그렇지 않다. 미리 설명을 해주어도 체감한 적 없는 소란과 촉감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다.


후배와 커피 한 잔 해보겠다던 작전은 로디의 ‘성공적인’ 물놀이터 체험으로 목적이 달라졌다.


후배 가족이 도착했다. 1년도 전에 만났던 후배 딸 유민(가명)이가 이만큼 컸다니. 예쁜 수영복을 입고 나타난 유민이는 물놀이 경험이 많고 물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듣던 대로 유민이는 물고기가 되었다. 물 깊이가 어른 종아리 수준이지만 잠수도 하고 수영도 하며 유유히 바닥을 누볐다.


그에 반해 로디는 폭포 소리가 들리자마자 자신의 머리를 세게 때리며 성을 냈다. 로디가 두려움과 불편함을 표현하는 방식인데 영 고쳐지지 않아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로디, 괜찮아. 엄마가 지켜줄게.”


로디 귀를 막고 얕은 물에 발을 담가보았다. 이 과정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물에 한 발 담그는 것까지 로디에겐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기에 꼭 안아주었다. 너무 잘했다고.


그런데 로디 레이더망에 형, 누나들이 물총을 쏘는 장면이 들어왔나 보다. 물총 하나 준비해 둘걸, 이라는 늦은 후회도 잠시, 로디에게 물줄기가 세게 날아왔다.


“아아아악!!!”


로디가 또 다시 손으로 얼굴을 부비며 강한 반응을 보였다.


“깜짝 놀랐지? 괜찮아?”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은 로디를 안아주며 말했다.


“로디. 한 번 젖어버리면 괜찮아. 그러면 폭포도, 물총도 하나도 안 무서워. 한 번 푹 젖어볼까?”


이 말을 뱉고 나니 고3 시절 담임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선생님은 내가 순진무결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셨나보다. 나의 어떤 행동 때문에 그렇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보수적이었고 주어진 규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했다.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이 뒤에서 수군거릴지라도. 어쩌면 경직된 학창시절을 보낸 듯하다. 그런 날 어떻게 아셨는지 선생님은 포근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새벽아. 먼지가 묻으면 털어버리면 돼. 인생에서 그런 먼지는 아무것도 아니야.”


젖어버리면 돼.

털어버리면 돼.


젖지 않으려, 먼지 한 톨 안 묻히려 아등바등 살지만 사실 한 번 젖어버리면, 그깟 먼지 한 톨, 묻어버리면 그만이다. 또 젖을까, 또 묻을까 마음을 졸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외부 상황에 유연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늘 숨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다 날 알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만큼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이 평생 걸어가면서 한 번을 안 넘어질 수 있을까. 지금 입고 있는 이 백색 옷을 언제까지 빛낼 수 있을까. 처음 넘어질 때는 세상을 잃은 듯해도 결국 걸어야 하기에 일어난다. 걷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한 번 넘어지고 나니 걸음걸음이 이전보다 훨씬 가볍다는 것을. 이제는 옆에 조금 질척거리는 새로운 길도 눈에 들어올 것이다. 또 다른 경험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이렇게 나약한 엄마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로디는 내 손을 꼭 잡고 다시 물놀이터에 나섰다. 물 폭탄 아래서는 여전히 무서움에 소리를 질렀지만 유민이를 따라 바닥에 엎드려보기도 했다. 조심조심 바닥을 더듬고 얼굴이 물에 들어가지 않게 자세를 잡은 후 발장구를 쳐댔다. 로디는 그 행동이 무엇인지도 몰랐겠지만 주변을 관찰하고 ‘이렇게 노는구나’를 배우고 옆에 있는 엄마를 믿으며 몸 전체를 물에 집어넣는 모습이 감격스러웠다.  


로디는 유민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물놀이터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경험했다. 심지어 내가 감히 도전하지 못한 높은 미끄럼틀까지. 이날만큼은 로디가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로디에게 용기를 주려 건넸던 말, “한 번 젖어버리면 괜찮아.”는 이제 나에게 해줘야 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뿌려질 흙탕물을 언제까지 평생 피해볼 요량으로 살 것인가.


엄마와 달리 어릴 때부터 넓은 세상을 차곡차곡 누비는 로디가 되길. 그 마음과 동등하게 앞으로 닥칠 불편함들을 유연하게 받아칠 로디 엄마가 되길.




사랑하는 로디에게.


로디가 외모는 아빠지만

속은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부쩍 느끼고 있어.


건들면 부러질 것 같은, 딱딱했던 엄마의 과거를

너에겐 숨기고 싶지만

그래도 부끄럽지는 않아.

그만큼 올바로 살려고 노력했거든.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겐

마음 졸일 일이 많아.


지금의 나와 겨우 이뤄낸 안정을

지키는 것이 너무 중요해져서

매일을 불안에 떠는 사람은

마음에 피로가 쌓이고

그 피로는 몸과 정신을 지치게 해.


그러다보면 결국 아파 와.

어디가 문제인지도 모르게 서서히.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결국 여러 번 넘어져봐야 하더라고.

넘어져도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고야 마는 사람.

먼지를 잘 털어내고 젖어버린 옷을 잘 말려 본 사람.


반찬을 손으로 집어 먹으면서

한 입, 한 입마다 옷에 손을 닦는 너에게 남기는 편지.


아니,

손에 묻히기 싫어 엄마에게 먹여달라는 너에게 남기는 편지.


아니, 아니.

로디 옷에 묻은 반찬 기름 자국을 보며

세탁 전처리할 생각에

피곤해하는 엄마 스스로에게 남기는 지시문.


- 로디에게 안전한 상황에서 도전할 자유를 주기

- 로디에게 허용된 공간에서 더럽힐 자유를 주기



이리 와, 엄마가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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