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숨 Mar 19. 2021

담담한 글에서 깊이 우러나는 공감


자신의 아픔을 반복적으로, 계속 같은 강도로 강하게 말하는 사람에겐 너무 어둡다느니, 그렇게 생각하면 더 아프다느니 등의 반응을 내놓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말보다 글을 더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말이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느낀 이후로.




한때 아주 아끼고 좋아했던 친구(A)가 있었다. 고3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내 옆에 항상 있어주면서 내 얘기를 들어주던 고마운 친구. 난 10대부터 20대 초까지 내면에 어둠이 가득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어두웠을 시기인 고등학생 때 날 지극히 챙겨줬고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하며 날 좀먹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바꿔주려고 노력했다. (그 친구가 의도했든 아니든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친구와의 좋았던 추억을 꺼내보면 항상 튀어나오는 따끔한 기억이 있다.


첫 번째 기억

난 어릴 때부터 소화 장애가 있었고 한창 예민한 고등학생 때는 사혈침을 들고 다니며 체기를 가라앉혔다. 매일같이 체했던 3학년 때는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주스로 밥을 때우기 일쑤였다. 그때부터 날 봐 온 A와 대학 때도 밥을 같이 먹었는데 그날도 난 여전히 속이 불편했다. 그래서 습관처럼 튀어나온 한 마디. “아, 체할 것 같은데. 조금만 먹어야지.” 그때 A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체하는 거야. 너가 그렇게 말하면 같이 먹는 사람도 체할 것 같아.”

그때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체할 것 같다’는 말을 올리지 않았다. (남편 제외...미안)


두 번째 기억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나는 때때로 억압된 듯 가슴이 답답했고 내가 뭘 해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실 것이란 생각이 강했다. A와 커피를 마시며 “내가 그렇게까지 할아버지한테 마음을 썼는데 할아버지는 나한테 화를 내셨다니까? 이제 할아버지한테 절대 하는 일이 없을거야, 절대.라고 말했고 잠자코 듣던 A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러지  .   ‘절대. 항상 부정적이야.”

그 뒤로 ‘절대’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조심하려 했다.



내 안에 차오르는 아픔이나 어둠을 계속해서 발산하면 주변은 그 악취에 코를 막고 그 울상에 눈을 가릴 것이다. 자기 몸 하나 구제하는 것도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친구의 ‘징징거림’까지 매일 들어줄 만큼 에너지가 많은 사람은 많지 않다. 나에겐 이 두 기억이 주변 사람에게 말조심하려는 태세를 갖추게 한다. 물론 회사에서는 이성을 잃고 침을 튀며 말할 때가 종종 있지만, 노력한다. 내 불평으로 이 사람들의 마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세상을 밝히는 빛은 못 되더라도 타인의 마음에 둥둥 뜨는 검은 기름이 되진 않도록.


그런 마음을 품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결혼을 했고, 그 직후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아야 했다. 예전같으면 수술이 결정된 후 바로 A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간 연락을 했든 말았든 상관없이 내 인생에 일어난 큰 이벤트를 공유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나 나나 각기 제 삶을 사느라 바쁜데 굳이 좋지도 않은 몸 상태를 알려봤자 이 관계에 무슨 유익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수술이 결정된 후 먼저 가족에게, 그리고 회사에 연차를 쓰기 위해 수술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매일같이 연락하는 소수의 친구들에게 내 상태를 알리고 수술 잘 받고 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했다. 무섭다는 둥, 걱정된다는 둥 쓸데없는 사설은 접어두었다.


그러고 1년쯤 후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A가 (아마 둘 중 하나의 생일이었겠지) 그간의 근황을 물어와서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고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를 왜 이렇게 담담하게 하냐고, 괜찮았냐며 물어왔다. 다행이다. A를 이전처럼 힘들게 하지 않고 오랜 시간 잘 지내왔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생각나는 대로 튀어나오는 말보다는 글이 편하다. 글은 말보다 논리적이고 정제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정돈되지 않은 ‘날 감정’은 어느 정도 제할 수 있다. 내 마음은 다 바스라질지언정 글에서만큼은 그 지저분한 부스러기가 묻어나지 않게 연습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담담한 글이 독자로부터 숨은 아픔을 스스로 캐내게 만들어 더한 공감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은 애써 짜낼 수록 그 짙은 농도에 받는 이가 거북할 수 있다. 그것을 알게 해 준 A에게 감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인드컨트롤의 유효기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