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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Apr 14. 2021

불멍 말고 세탁멍

불멍
: '불을 보며 멍때린다'의 줄임말


불멍이라는 단어는 캠핑족들이 사용하던 신조어가 확산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유튜브로 불멍을 검색하면 장작이 타는 영상에 사운드를 더한 영상이 대거 쏟아져 나온다. 그뿐이 아니라 실제로 에탄올을 부어서 불을 붙일 수 있는 가정용 불멍 장비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unsplash


불멍의 유행을 보며 '얼마나 할 짓이 없어서 멍때리는 것이 유행하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머리가 복잡하면 시간을 내어서 멍을 때려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는 시대가 되었는가'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몇 년 전에 방영된 알쓸신잡2에서 유현준 교수가 해준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 심리학자가 말하길 원시시대에는 사람들이 불규칙하게 타 들어가는 장작불을 바라보는 것으로 사냥에 대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풀었는데 지금 그 불이 TV가 되었다고. 그래서 퇴근 후 30분 정도는 움직이는 화면을 생각 없이 보는 것, 즉 멍때리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다고.


그래, 인간이 불멍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해는 하지만 나는 그런 방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 라고 생각했던 내가, 그랬던 내가! 가만히 앉아 멍때리면서 잡생각을 버리는 재미를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나의 멍때리기는 불멍과 다른 점이 있다. 바라보는 대상이 불이 아닌 세탁기라는 점에서.




세탁멍의 시작은 이랬다. 여느 때와 같이 빨래를 하러 세탁실에 들어갔다. 세탁기 문을 연 다음 세탁물을 분류하면서 옷가지를 하나하나 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세탁기 문을 닫고, 적당량의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고, 전원 버튼을 누른 후 다이얼을 돌려 표준코스로 맞추고 시작 버튼을 꾹 눌렀다. 윙 소리가 나면서 세제를 투입하는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솨아-. 세탁기 안에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세제 거품이 일고, 조금 기다리니 빨랫감이 돌아갔다.


여기까지만 지켜보아도 수분(數分)을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것에 빠져 있나.


pixabay


당시 나는 회사 일도, 집안일도 잘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금 울적한 상태였다. 퇴근하면 탈수되지 않은 빨랫감 마냥 무겁게 늘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해 배를 채우고 잠들기 바빴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었고 그냥 지나가는 시간에 멱살 잡혀 다음 날에 도착해있는, 그렇고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업무도, 살림도 영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내가 별로였다.


그런데 우리 집 세탁기를 보고 있자니, 시작 버튼이 눌러지고 일이 마쳤음을 알리는 종을 울릴 때까지 누구도 바라봐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성실히 우리의 옷가지를 물로, 세제로, 섬유유연제로 때를 빼고 향을 내준다. 세탁기도 누가 보든 말든 이렇게 자기의 본분을 해내고 남에게 기분 좋은 말끔한 옷을 내주는데 내 하루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어떤 유익을 남겼나 생각하니 내가 자꾸만 작아졌다.


세탁기 하나 보면서 별 개똥철학을 들이미냐 싶지만 누구나에게 그런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자아를 탐구하고 싶어 상념에 깊이 빠질 때가. 이때는 평소에 관심도 없던 사물이나 생각을 보며 묵상하는 경우가 많다. 세탁기라든가, 세탁기라든가... 그러다보면 되도 않는, 곁길로 샌 듯한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 뭐 어떤가. 나 혼자 생각하고 오늘보다 내일을 잘 살려 노력하는 건데. (이제 공개된 생각이지만, 아 돈 케어)


그 뒤로 세탁기가 일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그윽히 바라보니 때가 빠지는 옷이 보기 좋아 그 앞에 자리를 잡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내 옷을 깨끗이 빨아주는 세탁기가 기특했을 뿐인데, 어느 날은 평소처럼 세탁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데 마치 매직아이를 성공하는 느낌과 같이 서서히 '멍'의 의식단계에 도달하였다. 내 정신적 렌즈는 어디에도 초점을 두지 않았고 모든 잡생각이 흐려졌다. 이때 내 머리를 똑똑 두드리며 "누구 계세요?"라고 물어보면 아무도, 그 어떤 생각거리도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아차 하고 다시 걱정거리가 가득한 현실로 돌아오는데 無의 세계, 즉 '멍'의 세계에서 날 깨운 건 다름 아닌 감각이다. 세탁실이 춥다든가, 다리가 저린다든가 하는 문제들.


  개운하게 멍때리고 깨고 싶은 마음에 두꺼운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서 세탁기를 볼까 생각했으나 의자를 놓기엔 세탁실이 좁고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기엔 세탁기가 낮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우리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은 주로 내가 회사에 있을 때다. 주말이 아니면  시끄러운 세탁기를 밝은 대낮에 바라봐   없다. 그리하여  세탁멍은 차츰 줄어들었다.




며칠 전 집 앞 코인세탁실에서 이불 빨래를 해봤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 이불로 갈아탈 때 봄 이불을 들고 코인세탁실을 한번 방문하여 충분히 멍때리는 시간을 가져볼까, 작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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