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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Jun 09. 2021

마스크 "눈에게는 구속을, 입에게는 자유를!"


코로나가 터진 후 적자에 휘청거리던 수많은 사업체와 달리 수요 물량을 따라가지 못해 결국 국가가 나서서 물량을 확보하고 금액을 조정했던 아이템이 있다.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면 앞서 언급한 아이템이 마스크라는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얼굴에 박제된 듯이 매일같이 소비되고 있으며 마스크를 편하게 사용하기 위한 파생 제품들이 생겨 난다. 마스크 스트랩, 마스크 보관함, 마스크걸이, 마스크패치, 마스크 귀보호대 등.


얼굴의 절반만 보고 산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길을 가다가 마스크를 벗은 사람을 발견할 때는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원래 코와 입이 없었던 것처럼, 얼굴의 완성은 마스크인 것처럼 느껴지는 내 생각이 더 섬뜩할 정도로 반 가려진 얼굴이 자연스럽다.


동양에서는 감정을 표현할 때 눈이 중요해서 이모티콘도 눈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   -.-  하지만 서양은 입이 중요해서 온라인상에서 표정을 나타낼 때 이렇게 표현한다. :)  :(  유명한 이야기로, 동양에서는 인기쟁이었던 키티가 서양에서는 제대로 망했는데 그 이유가 입이 없어서라고. 그래서 나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마스크로 덮이지 않은 눈으로 이전과 같이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표정에서 입의 역할이 사라진 1년간 내가 사람을 대할 때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




하나. 눈과 눈썹이 과도하게 움직인다


입이 마스크에 가려진 이후, 입이 가려진 상대와 대화를 하다 보면 라디오를 듣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내 앞 사람이 아닌 옆 사람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기묘한 상황. 상대가 감정을 실어 이야기를 해도 눈이 굳어 있으면 결국 무표정으로 날 상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후 나는 좋으면 좋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눈을 반달로 만들어 감정을 과장시킨다. 반대로 떨떠름한 상황에서도 거짓 반달을 보이면 웬만하면 속마음을 감출 수 있(는 것 같)다. 


둘. 눈 아래부터는 신경쓰지 않는다


이전에는 대화 중 입의 모양에도 신경 썼다. 너무 크게 웃는다 싶으면 입을 오므렸고 웃고 싶지 않지만 그래야 할 때는 은근하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미소를 지어보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잇몸이 마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입을 닫지 않는다. 또한 묵음 처리가 된 혼잣말을 많이 한다. 입과 목을 동여매고 속으로 삼켜야 했던 말을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내뱉기만 해도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 외에 식사 후 치아에 고추가루가 꼈는지, 입술이 허옇든지 말든지 덜 신경쓰기 시작했다. 




마스크는 드러난 잇몸을 가려 주어 표정에 자유를 주기도, 거짓된 반달 눈을 생성하여 가식을 조장하기도 한다. 몸의 각 조직에 자아가 있다면 입술은 나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는 지금을 충실히 누릴 것이고 눈은 사회 생활로 피곤에 절여졌을 것이다. 마스크는 공동체 생활에서 인공적인 표정이 필요한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게 만든다. 마스크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면 이전의 방식으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하긴, 마스크가 없던 시절을 미치도록 그리워한 기간은 몇 달이면 충분했다. 마스크 없이 외출이 불가능한 시절을 까마득하게 여길 기간도 그 몇 달이면 충분할 테니 눈의 구속과 입의 자유가 풀릴 때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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