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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May 30. 2023

우리 집에 블랙홀이 있나

세탁기에서 양말을 잃어버린 경험. 한 번은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세탁기에 블랙홀이 있나

하지만 곧 알게 된다. 괜한 공상이라는 것을. 사라진 양말은 세탁기 옆에서, 옷 서랍장 옆에서, 침대 아래서 발견된다. 어디에 있든, 어쨌든 머지 않은 때에 집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정말 블랙홀이 있나보다.




한 달 전, 아들 '로디'의 전자펜이 사라졌다.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은 꼭 하나씩 가지고 있는 전자펜. 책에 펜을 갖다대면 펜이 책도 읽어주고 그림도 설명해준다. 가장 유명한 제품은 비싸서 구매를 안 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 출판사에서 새로 출시하는 전집에 전용 전자펜을 준다는 소식에, 게다가 파격할인도 한다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매했다. 어딜 가나 이 펜과 책이 있다면 로디의 무료함이 최소 10분은 해결되었다. 그런데, 로디의 오랜 친구였던 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전집 중 아직 뜯지 않은 책도 많은데. 


펜이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곳은 냉장고 옆이다. 로디가 주방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전문을 설치했는데 안전문과 냉장고는 90도를 이루고 있다. 로디는 항상 그 코너에 낀 채로 안전문 건너에서 밥 차리는 엄마를 쉴새없이 부른다. 그날도 로디는 어김없이 엄마, 엄마를 불렀고 그때 손에는 책과 펜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펜은 '안녕, 다음에 또 만나자'라며 꺼졌다. 그 소리는 남편도, 나도 똑똑히 들었고 로디도 '안녕'의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그때 펜은 로디 손에 없었다.


그날 저녁, 펜이 안 보였다. 다음 날 아침에도 못 찾았다. 아이 하원을 위해 집에 오신 친정엄마께 펜을 찾으면 알려달라 말씀드렸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엄마는 항상 찾아주었다. 내 기억상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엄마의 수색 능력은 내 평생동안 검증되었기에 '찾았다'라는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틀간 펜이 있을리 없는 곳까지 뒤져본 엄마는 '그 펜은 이 집에 없다'는 사망, 아니 실종선고를 내렸다. 펜을 잃어버린 것을 알기 2시간 전, 내가 쓰레기를 비웠는데 엄마 생각엔 비운 쓰레기에 펜이 달려 갔음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펜은 이 집에 없는 것이 확실하니까. 


절망이었다. 


그럼에도 찾아야 했다. 냉장고에 줄자를 넣어 휘저어 보는 노력을 시작으로 구석이란 구석은, 틈이란 틈은 다 뒤져봤다. 어둠이 자리한 모든 곳에 핸드폰 불빛을 갖다대었다. 하루는 1시간, 다음 날은 2시간, 그 뒤로는 어느 방을 가든, 어느 장을 열든 펜 찾기를 의식했으니 시간으로 따질 수 없다. 


그 펜이 어떤 건데. 매일같이 펜을 끼고 다니며 노래를 듣고 책을 읽었다. 아이의 흥을 돋우는 데에 이것만한 것이 없었다. 출시 기념으로 핫딜에 산 아이의 첫 전집이었다. 아이에게 전집 한 질 사주고픈 내 소망의 실현이고 아이 평생 절반 이상을 함께 한 장난감이었다. 책은 남았으나 펜이 없는 책은 활용성이 절반도 안 된다. 펜을 사용하지도 못한 1/3가량의 책은 아직 비닐에 갇혀 있다. 이젠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 내 미련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펜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펜 실종 5일째 되던 날, 펜을 사서라도 다시 손에 쥐고 싶었다. 출판사에 연락하여 펜만 따로 구입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가격을 들었으나 노코멘트하겠다. 전집을 핫딜로 30만 원도 안 되어 구입했는데 펜을 그 가격에 살 수 없었다. 아무리 로디의 추억이 가득한 펜이라 해도 그건 안 되었다. 당근에 '펜 구입합니다'를 올렸지만 연락은 없었다. 결국 차선책으로 조만간 마련하려던 자연관찰 전집과 이 책에서 작동하는 펜을 당근으로 구매했다. 어쩌다보니 서론에서 말했던 가장 유명한 전자펜의 1세대 제품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로디는 잃어버린 펜의 절반도 채 사용하지 않았다. 


블랙홀의 소행은 펜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주일 단위로 친정엄마의 지역화폐카드, 나의 블루투스 이어폰의 이어캡, 로디의 여름 이불을 거둬갔고 마침내 로디의 숟가락까지 먹어치운 사실이 어제 밝혀졌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보통 집 안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이틀 안에 찾았다. 찾기 시작할 때 물건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항상 깔려있는 상태이며 그 믿음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 달동안 사라진 물건들은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남편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하소연했다. 


"왜 우리 집에서 물건들이 사라지는 걸까? 진짜 이상하지 않아? 대체 왜? 왜!" 




로디의 펜을 잃어버린 지 꼭 30일째 되는 오늘. 알찬 휴일을 보내고자 했던 다짐과 달리 별다른 성과가 없어 아쉽던 차에 로디가 자고 있는 이 밤, 아주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다. 요 일주일간 계속 글을 쓰고 싶었다. 우리 집 블랙홀에 대해. 나의 소중한 것들을 빨아 먹는 요 악랄한 대도에 대해. 


얼마나 노트북을 안 켰던지 방전이 되어 전원을 연결하려는데 멀티탭에 꽂아둔 안전커버가 너무 꽉 껴서 도저히 손으로 뺄 수 없었다. 그래서 펜치를 찾으러 창고에 갔는데 작은 줄자가 보였다. 줄자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날을 기억하니 자연스레 펜이 떠올랐다. 오늘 쓸 글과 잘 어울리는 소품이었다. 펜치로 안전커버를 빼고 노트북 전원을 꽂은 후 펜치를 두러 창고에 갔는데 다시 줄자가 보였다. 


진짜 마지막이다. 


한 달동안 이 말을 과장 없이 10번은 되뇌었을 것이다.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마지막이란 말을 썼으니 10번은 결코 적은 횟수가 아니다.


다시 한번 줄자를 들고 냉장고로 걸어간다. 10초 남짓한 시간동안 여러 생각이 스쳤다. 분명 뒤져봤던 장소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이지만 꼼꼼히 줄자를 휘저어봤다.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제 제법 익숙해진 실망감, 또 느껴도 타격은 크지 않을 것이다. 아니, 또 애통하겠지만 멈출 수 없다. 


40~50cm 빼내어 냉장고 옆을 공략해본다. 영 각이 안 나온다. 당연하다. 냉장고와 벽 사이는 5cm도 안 된다. 실망할 시간을 최대한 늦출 속셈이라는 것, 나도 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이제는 정면으로 자를 넣는다. 아이 매트가 문 아래를 꽉 막고 있어 쉽지 않지만 어찌어찌 쑤셔 넣어 유연한 자를 살살 움직여본다. 그런데, 


툭.


...


눈을 감고 손끝의 감각으로 어둠 속을 유영했다. 


탁.


이게 펜이 아니라면 지금 올라가고 있는 이 맥박은 그 두 배만큼 떡락할 테다. 하, 너무 싫다. 너무 싫다, 진짜.


다시 한 번 집중해서 냉장고 중심에서 바깥 쪽으로 자를 쳤는데,


또로로. 


속에서 여러 비속어가 섞여 올라왔지만 삼켰다. 냉장고와 벽 사이, 그 어두운 틈새로 뚜렷이 보이는 노랗고 검은 연필 모양의 펜. 


마음을 다독이고 서재에 있는 남편에게 펜을 자랑했고, 최근 여럿 상실을 경험한 내 참담함을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은 남편은 내가 더이상 우울에 빠지지 않을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자신의 귀가 고통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기쁨도 있었겠지.)




펜에 이어 차례로 사라졌던 카드와 이불, 숟가락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졌다. 


우리 집에 블랙홀은 없다.


불과 이 글을 쓰려 노트북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이 글이 통쾌한 결말로 끝날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이 펜을 찾을 수 있었던 열쇠는 이 야밤에 줄자를 찾게 한 멀티탭 안전커버, 아니 노트북, 아니 글을 쓰려던 마음에 있었던 게 아닐까. 새벽 2시가 지나가고 있지만 내일 출근이 피곤하지 않을 것 같다. 아침이 밝자마자 로디에게 펜과 책을 가지고 달려갈 테다. 


우리집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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