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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Feb 08. 2023

엄마 딸은 늘 예민했어

워킹맘이 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15개월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걸 한사코 반대하시던 친정 엄마만이 내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고 그렇게 새해가 되자마자 아이는 외할머니께 맡겨졌다. 편도 50분 거리의 딸내미 집에 출퇴근하며 12시간동안 아이를 봐주시는 엄마께 교통비와 반찬값 정도의, 양육비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돈을 용돈이랍시고 이체해 드렸으나 엄마는 ‘본인보고 이 집 살림을 다 살라는 뜻이냐’며 그 적은 돈도 절반으로 줄여 달라 요청하셨다. 


그런데, 나는 분명 아이만 잘 봐 달라 부탁드렸는데 내 손 아래서 굴러가고 있던 살림은 서서히 엄마 지휘 아래 통제되고 있었고 빠르게 그 방식에 적응하고 있었다. 살림살이들은 내 손아귀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정돈된 모습으로 날 맞이했으나 그들은 나를 한물 간 상관 정도로 보는 듯했고 한 달 새 나와 우리 집은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의 갈등은 항상 거기서 시작한다. 나는 내 속도대로 움직이고 싶고 엄마는 내 속도를 기다릴 수 없다. 빨래도 매일, 재활용 비우기도 매일, 음식쓰레기 처리도 매일. 굳이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된다는 내 말은 엄마로부터 “니가 안 하니까 내가 하지!”를 끄집어내고 실과 바늘처럼 내 입에서도 “누가 하랬냐고!”가 뒤따라 나온다. 안 봐도 뻔했던 미래. 늘 그랬지, 우리는. 


이렇게 한바탕 하고 나면 엄마는 본인 딸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예민해진다고 하신다. 그런 엄마에게 적잖이 충격을 준 사건이 터졌으니. 때는 일주일을 거슬러 올라간다. 




오전 7시 50분쯤,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을 들어선 엄마는 곧장 손을 씻고 아이와 눈 맞춤을 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신다. 그리고는 커다란 가방에서 아이 먹거리와 아이와 함께 놀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신다. 유튜브에서 16개월 아이를 먹이고 아이와 노는 방법을 검색하면서 쉽게 따라하고 응용하시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나보다 외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건강 면에서도 정서면에서도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원치도, 쓸모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가 보따리에서 꺼내는 물건들을 가만 보고 있다가 두꺼운 스프링 노트에 눈이 갔다.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가만. 이거 내 노트잖아? 


다소 낯선 글자체가 내 것이 아닌 듯했지만 제일 위에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노트를 펼쳐보니 아무 내용도 없다. 그래, 내가 뭐 공부를 했겠나. 친정댁에 가면 내가 분명히 버렸던 나의 옛것들이 부모님의 책장에서, 옷장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게 왜 여기 있냐고 묻는 내 눈빛에 기다렸다는 듯 엄마가 말한다. “이런 걸 왜 버려! 멀쩡한 걸.” 이 노트도 그렇게 엄마 손에서 구원되어 내 아이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세상에. 적어도 15년은 내 손을 떠나있었던 노트가 다시 우리 집으로 들어오다니. 원래 내 것이었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존재가 살림살이 말고 또 있다니. 대체 이 노트가 어떻게 아직도 살아남았는지 감탄하고서 서둘러 출근을 했다. 엄마는 전직 어린이집 선생님답게 아이의 놀이시간, 점심시간을 하나하나 찍어 나에게 알림장처럼 보내신다. 여느 때와 같이 메시지로 이미지가 도착했는데 웬걸, 아이가 아니라 내 노트다. 노트 표지에는 내가 봐도 유치뽕짝한 글이 쓰여 있었다.      


열심히 해보자. 비교 안 당하게.
서러워 하지만 말고 일단 해보자.
STUDY란 힘들지만
STUDY 때문에 코피 흘릴 때까지 해보는 거다.
이게 다 오빠 때문에 비교 당한다고.



뭐야, 이게. 내가 적은 건가?      


아침에 노트에 적힌 내 이름을 확인할 때는 이 문구들이 왜 눈에 안 들어왔는지 의아할 정도로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던 다짐, ‘열심히 해보자’. 웃긴 건 노트 표지에 그렇게 크게 다짐을 적어놓고 속지는 텅텅 비어있었다. 한껏 웃어재낀 후 이미지 뒤에 달려 온 엄마가 보낸 문자들이 보였다. ‘슬프다’, ‘미안해’, ‘사랑해’.     


돌이켜보면 엄마가 나와 오빠를 비교한 적은 거의 없다. 공부하라고 떠민 적도 없다. 오빠는 머리가 좋은 자식이고 나는 엉덩이가 무거운 자식이라며 날 안타까워하셨던 기억은 있지만. 다음 날 아침, 엄마는 ‘나는 별로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 너 스스로 그렇게 느낀거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비교한 주체가 없는 그 다짐글에서 엄마는 자신을 주어로 설정했다. 자극을 주려 비교 대상이 필요했던 내가 무심코 적었던 글이었을텐데. 나와 오빠를 비교한 건 부모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을 텐데. 


엄마 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민하다. 특히 말은 그 어떤 표현보다 날카롭게 씹고 뜯고 맛본다. 엄마 딸도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심리학 책을 보고 유튜브 강의를 찾아본다. 이해해 달라는 말은 아니고. 그냥. 변한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옛 기억.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 시험을 쳤다. 입학시험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성적 통지서를 받았다. 초등학생 때는 그저 아파트 단지에서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로 시간을 보내던 나였는데 이제 공부라는 것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사건이었다. 반 12등. '오빠는 몇 등이었을까.' 괜한 생각때문에 하찮은 종이짝 위에 인쇄된 12라는 숫자가 한껏 더 하찮아졌다. 통지표를 쥔 채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던 길. 성적표는 드려야겠고, 하지만 떳떳하지는 못하여 민망함을 감추려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성적표 나왔는데 반에서 24등이야.”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헤, 짜잔!”


24에서 12를 보면 충격이 상쇄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먹히지도 않을 농담을 했다.


“니는 이게 잘한 거라서 거짓말 한거가?”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그 노트 하나로 꽤 깊숙한 자리에서 떠오른 기억. 엄마는 웃었던 것 같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던 듯한데 민망함 때문인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기억. 앞으로는 오래 간직되는 말들이 따듯한 재질이었으면 좋겠다. 내 예민함이 냉기보다 온기에 반응하는 날이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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