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숨 Nov 01. 2021

제 아이는 제가 키울게요

조리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 살고 있던 집은 계약이 만료되었고 이사 갈 집은 내년 중순에나 입주가 가능하다. 1년 월세를 알아봤지만 우리를 받아 줄 건물주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흔히들 말한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 도움이 필요하며 친정집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그들의 말마따나 나는 친정집에 들어온 이후 부모님 도움 아래 세 끼 밥을 잘 챙겨먹고 마음 편히 샤워할 수 있으며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내게 그 어떤 집안일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다 가져가신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져가신 것은 집안일 뿐 아니다.


으엥 으엥 으엥 으엥

으에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ㅔ엥


아가가 10초 이상 울어버리면 어김없이 문이 열린다. 아빠가 아이를 안아주려 쫓아오신다.


밤 11시쯤 또 문이 열린다. 이번엔 엄마가 아가 옆에 누우신다. 내가 혼자 밤에 아이를 케어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시며 아이가 울면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신다.


아이를, 육아를 뺏겼다.




엄마가   28일째. 조리원 퇴소한  이제  2주가 흘렀다.  전까지 나는 아이를 안아  적도, 기저귀를 갈아준 적도 없으니 서투를 수밖에 없다. 아이가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이와 하루종일 붙어있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아이와 내가 합을 맞추며 살아갈  있을테니 아이를 내가 온전히 케어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눈에 나는 너무 부족한 엄마라,  불안한 엄마라 나에게  작고 소중 아이를 맡기기 불편하셨나보다.


부모님은 아이를 케어하는 일만큼은 엄마인 나에게 맡기셔야 했다. 내 몸조리를 위해 어느 정도 도움을 주실 수는 있으나 내가 잘할 수 있게 옆에서 '지켜봐 주시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내 몸이 편하도록 본인들이 다 '해치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내 아이를 사수하기 위해 갖은 말로 부모님을 설득하였지만 변화는 없었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늘 희생하셨지만 나는 그런 희생이 때론 부담스러웠고 불편했다. 그 희생은 때때로 비아냥 섞인 말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물이 아무리 깊은 사랑과 배려로 채워져있다 하더라도 "니가 뭘 할 줄 알아?", "니가 혼자 감당할 수 있나?"라는 말로 포장되면 본래 부모님이 주고자 하셨던 사랑과 배려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끝까지 내가 하겠다고 우기는 순간 "그래. 니 마음대로 해봐라. 니만 고생이지."라는 말이 날아온다. 앞으로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뉘앙스와 함께. 그러면 그나마 쥐어짜던 용기와 자신감이 바짝 말라버린다.


얼마 전 분유를 충분히 먹고 1시간정도 지났는데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아빠가 또 나타나 우는 아이를 안고 거실로 나가셨다. “얘 지금 배고픈데?”라면서. “얘는 외할아버지 품에 들어오기만 하면 눈물을 뚝 그친다.”라면서. 더 먹으면 배앓이 할지도 모르는데 더 먹여야 했던 걸까? 아이는 안긴 자세가 불편해서 내 품에서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던 걸까? 여기에 아빠는 굳이 한 마디를 더 보태신다. "역시 니 혼자서는 안 되겠제?" 아빠가 아이를 데려가신 후 아이 눈물은 멈췄지만 내 눈물이 터졌다. 매일 밤 나는 아이와 합을 맞출 기회를,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제는 모유를 먹고 30분도 안 되어 우는 아이를 본 엄마가 아이를 안아들고 이렇게 말하셨다.


"로디야, 니가 그렇게 배고프다는데도 니 엄마는 니를 그래 굶기더나?"


수유텀(수유를 시작한 때로부터 다음 수유를 시작할 때까지)이 너무 짧아 아이가 울어도 바로 젖을 물리지 않는 나를 탓하는 말이다. 그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젖과 땀 냄새로 절여진 몸과 착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나왔는데 아이는 부모님 방 침대에 놓여 있었다. 오늘 밤에도 아이를 부모님께 맡겨야 하는 걸까. 그래도 잘 자는 아이를 보면서 "아고, 이제 잘 자네. 우리 로디."라고 했는데 날아오는 한 방.


"배불리 먹으니까 잘 자지. 배고프면 자지나?"


결국 나는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하냐'고, '아이와 내내 붙어있으면서 내가 아이를 알아가야 하는데 아이가 울 때마다, 또 밤마다 아이를 데리고 가면 내가 아이를 어떻게 알아갈 수 있겠냐'고 엄마에게 따져 물었다. 요 며칠 '왜 말을 함부로 하냐'고 반복해서 말했던 나에게 기분이 나빴던 엄마는 요즘 본인이 말만 하면 내가 달려든다며 소리를 높이셨다. 그러면서 내가 혼자 아이를 보면 얼마나 힘들지 이야기하면서 어제도, 그제도 했던 말을 또 덧붙이셨다.


"니가 혼자서 어떻게 할건데? 밤에 내가 옆에 있을 때는 애가 울어도 일어나지도 못하더만. 혼자 하지도 못할 거면서 무슨."


아빠나 엄마나 본인들이 아이를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듯 말하는 것이, 내가 혼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거슬렸다. 특히 누구보다 아이가 안 아팠으면 하는 내가 수유텀을 벌어보고자 하는 행동들을 보고 아이를 굶기고 있다고 표현하는 방식이 내게 상처였다.


왜 맨날 나한테 못한다고 해?
내가 낮이고 밤이고 쉬지도 않고
유튜브보면서 공부하는데.


그런 내 말에 엄마는 아랑곳않고 말했다.


내가 언제 니 못한다고 했는데?
그리고 이게 공부한다고 되는거가?


방금 나보고 "혼자서 뭘 어떻게 할건데?"라고 말한 사람은 엄마가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니 공부라도 해서 잘해보려는데 그걸로 비난하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충분한 양을 먹었는데 얼마 안 되어 울어버리는 아이의 마음을,

때때로 내 실력과 노력을 무시하는 엄마의 마음을,

날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그 누구의 마음도 알지 못한 채 나는 출장 간 남편에게 밤마다 울면서 전화했다. 날 알아주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며 당장 달려오지도 못하는 남편을 붙들고 울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던 이 날 사건은 다음 날 매듭 지어졌다. 엄마가 먼저 손 내밀어 준 것이다.


엄마와 함께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어떤 배우가 한 정신과의사에게 상담을 받는 장면이 나왔다. '어머니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나?'라고 묻는 의사에게 배우는 '잘했다, 수고했다 라는 말을 듣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침묵을 깨고 엄마가 말을 꺼냈다.


"새벽이 니도 잘하고 있어. 엄마가 너한테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매번 혼자 하려고 하니까 안쓰러워서 그러는거지. 부모 도움을 받아도 되는 상황인데도 손목보호대 하고 잠도 못 자면서 굳이 혼자 밤새면서 애 밥 먹이고 달래는 게 마음 아프잖아. 뭐든지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가끔 서운할 때도 있어. 뭐든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래."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딸의 아이를 돌봐주신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려 엄마는 퇴근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저녁을 준비하신다. 조금이라도 분유를 빨리 탈 수 있게 젖병에 분유를 정량만큼 미리 넣어두시고 출산 후 찬물에 손 닿으면 안 된다며 젖병 세척까지 해주신다. 퇴직 후 집에 계신 아빠는 내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도록 낮에 빨래고, 설거지고, 청소고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신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으니 날 위한 배려에 날 위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늘 본래 뜻이 아닌 다른 표현으로 싸여 있었으니까. 이제야 내가 알고 있던 것, 그러니까 부모님의 행동은 날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꼭 말로 해야 아나?' 싶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좋은 듯하다.  


로디, 너도 왜 우는지 엄마에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ㅠㅠ


매거진의 이전글 가족 간 대화에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