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숨 Sep 27. 2021

가족 간 대화에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있는가

책리뷰 | 밤으로의 긴 여로

명절이 행복한 가정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마 불편한 대화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대화는 밤으로 갈수록 그 양도, 깊이도 심해진다.


가족 간 대화에는 과거의 아픔이 응축된 형태로 심심찮게 튀어나온다. 그 속에는 가족을 향한 비난이, 나를 향한 자책이 숨어있는데 아무리 감추려 한들 가족들은 아픔을 상기시키는 단어만 들어도 그때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 한다. 그렇게 상처 입은 이는 부단히 잊으려 애썼던 그 기억을 꺼낸 당사자, 즉 자신의 가족에게 똑같은 아픔으로 복수하려는 듯 다른 상처를 꺼낼 수 있는 말을 고른다.


가족이 나누는 하루 동안의 대화를 엮은 희곡인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이끄는 티론 가정은 아침에는 평범하고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밤으로 갈수록 서로의 과거를 들춰내고 헐뜯는다. 결국 다음 날 새벽에는 네 가족 모두 비참한 모습으로 거실에 남겨진다.


연극배우 출신의 아버지,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어머니, 그리고 두 형제.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버지 제임스 티론은 돈과 술에 집착하고, 어머니 메리는 모로핀 중독으로 밤마다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며, 형 제이미는 여자와 술에 빠져 살고, 동생 에드먼드는 폐병이 악화되어 곧 요양소로 옮겨져야 하는 상황이다. 각자의 상황만 봐도 망가진 모습이지만 가족이라 연결되어 있는 과거 지사가 서로에게 상처로 남아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하루 동안의 대화에서 수없이 가시를 돋우면서 처절한 대화를 이어간다.




티론 (찔려서) 그래서  덩치만 컸지 게을러빠진 녀석이 주정뱅이 건달이    탓이란 말이오? 집에 들어왔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이럴  알았어야 했는데! 당신은  독만 들어가면 자기는  빼고  탓만 하지!


메리 ~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홍역 걸린 제이미가 아기 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얼굴 굳어지며) 제이미는 일부러 들어간 거예요. 아기한테 샘을 내고 있었으니까. 아기를 미워했으니까.


제이미 ~  네가 성공하는  싫었어. 그러면 비교 돼서 내가  한심하게 보일 테니까. 네가 실패하기를 바랐지. 항상 너를 질투했어. 어머니의 아기, 아버지의 귀염둥이! (점점  적의에 차서 동생을 노려본다.) 그리고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탓이 아니란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


애드먼드 (울먹이며) 어머니! 그만요! (무턱대고 손을 내밀어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다시금 반감에 사로잡혀 바로 손을 놓는다.) 사랑한다는 말은 잘도 하면서... 얼마나 아픈지 말하려고 하면 들어주지도 않고...




이렇게 적나라한 대화가 이어지는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작가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심적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의 아내 칼로타는 작업 후의 그를 보고 난 후 이렇게 표현한다.


"들어갈 때보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다."


작가는 아내에게 이 작품을 자신이 죽은 지 25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절대 발표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그 아내는 결국 작가 사후 3년 만에 세상에 작품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아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가 열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이 작품을 바치면서 짧은 헌사를 남겼는데 이를 보면 그에게 아내의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소중한 내 사랑,
당신과의 십이 년은
빛으로의, 사랑으로의 여로였소.
내 감사의 마음을 당신은 알 것이오.
내 사랑도!




이 책을 읽은 때는 이번 추석, 장소는 친정. 그래서인지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남편이 출장을 가는 바람에 아주 오랜만에 친정 식구 네 명만 모인 하루가 있었다. 아빠가 주도한 대화의 요지는 '너희 남매는 각자 가정이 생겨도 끝까지 애틋한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였다. 하지만 대화에 쓰인 내용 중 대다수는 행복한 기억보다 아팠던 기억이다.


곧 결혼을 앞둔 오빠와 만삭인 나를 두고 아빠는 "이제 이렇게 네 명만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니" 라고 입을 떼며 대화를 이어갔다. 가족의 아픔은 가족이기에 내 일처럼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공감'에 맛 들이면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는 가족에게 다 쏟아내고 싶어진다. 그것도 잊을 만하면 수시로!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가족이 공유하는 기억이기에, 혹은 가족에게만 은밀히 비칠 수 있는 아픔이기에 이를 듣는 가족은 당사자와 똑같이 아프다는 것을. 그리고 들을 때마다 무뎌지기는 커녕 더, 더 깊이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설령 말하는 이는 마음이 가벼워지더라도. 아니, 정말 가벼워지기는 하는걸까.


당연히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슬픔을 해소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 횟수는 적을수록 좋고, 상대가 상처입지 않는 수준에서 끝내야 하며 그 끝은 과거의 힘듦을 잊을만큼 행복한 추억이나 기대감으로 매듭지어 주는 것이 예의다. 실컷 한탄 혹은 비난을 쏟아내어 아프게 하고선 수습하기 위해 엉성히 마무리하는 것은 다음 번 대화에서 상대에게 방어태세를 가지게 만들 뿐이다.


다행히 아빠는 가족의 대화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충분히 애써줬지만 그럼에도 씁쓸함이 더 컸음은 부인할 수 없고 그렇게밖에 받아들이지 못한 딸이라 가족으로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번 명절을 지나면서 '나는 되도록 자식에게 내 상처를 내비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자신은 없다. 나도 나이가 들면,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이가 점점 줄어들면, 어제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고 행복한 추억이 계속 쌓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가족의 아픔을 상기시키는 대화를 이끌고픈 욕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내가 기억해냈으면.

상처를 치유하는 추억을 쌓고 꺼내는 일에 인색해 하지 않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출산휴가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