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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May 30. 2022

흙이 묻으면 그냥 털면 돼

고2 학기 말, 고3 반 배정을 확인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놀란 친구들이 나를 토닥이며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가출을 했다.




고2 담임선생님은 성적표가 나오는 날 이전보다 성적이 떨어진 아이는 물론 목표한 성적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에게 체벌을 가하셨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체벌을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이쯤 되면 학부모가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울분을 터뜨렸지만 그 어느 부모님도 학교로 찾아오지 않았다. ‘야자(야간자율학습) 째기'조차도 해본 적 없는 내가 회초리 모양으로 우그러진, 멍이 들어 푸르죽죽해진 손바닥을 보니 참담했다. 그런데 이런 굴욕을 안겨 준 사람과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다니.


엄마에게는 아침 댓바람부터 잠시 나갔다 온다 말하고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시작하는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간 종점을 향해 달린 후 다시 1시간을 돌아와 번화가에서 혼자 조조영화를 봤다. 그리고 롯데리아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읽히지도 않는 책을 봤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였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내용은 없다. 그렇게 한참을 배회 후 집으로 돌아가니 엄마는 딸이 실종되었다고 경찰에 신고하려던 참이었단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을 뿐인데. 난 대체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집, 학교밖에 모르던 내가 가출까지 해가며 피하려 했던 선생님에게 반전이 있었으니, 야자 시간에 복도에서 학생들과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다. 고3이 되어서도 티타임은 계속되었고 머지 않은 때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하시려나 싶어 긴장하며 복도로 나갔는데 환하게 웃으시며 맞아주셨다. 간단한 안부를 물으신 후 특별히 힘든 것은 없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다들 힘든데 나만 특별히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내게 철이 빨리 들었다 칭찬 비슷한 말을 하셨다.


그러다 상담 말미에 의외의 말을 건네셨다.


새벽아. 흙이 묻으면 그냥 털면 돼


무슨 의미인지 몰라 선생님을 가만 보고 있으니 세상 인자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새벽이는 너무 깨끗하고 하얀 옷을 입고 있어. 그러다보니 '먼지가 잘 안 지워지면 어쩌나', '더러워지면 안 되는데'와 같은 걱정을 하면서 매사에 긴장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아. 그런데 살다 보면 그리 큰일 아니야. 괜찮아."


선생님은 내게 학창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풋풋한 일탈도 경험해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선생님한테 혼도 나보고 엇나가보기도 하면서 이 시간을 보내도 큰일나지 않는다고. 선생님은 평소에도 내게 글자를 크게 쓰라고 하셨다. 그리고 키도 큰데 책상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쪼그라들어 공부하는 자세를 고치라 하셨다. 이 습관들은 소극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거라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험난할 것이기에 담대해져야 한다고.


그러고보니 난 늘 주눅들어 있었다. 키가 커서 가만히 서 있어도 눈에 띄기 때문에 최대한 수그리고 다녔다. 선생님께 내 존재를 숨기고 싶어 그 어떤 일탈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도 감시하지 않는 청소시간이지만 CCTV가 있다고 생각하며 맡은 구역을 쓸고 닦았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산만했던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움직이지 마"라 얘기했다고 화장실도 참았던 나다. 선생님은 학부모 면담 때 엄마에게 "이런 애가 무섭습니다."라고 했단다.

 



성적으로 체벌을 내렸던 교육 방식엔 지금도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극정성이셨던 선생님이다. 고등학교 내내 위장병에 시달린 내게 아침마다 교무실에 들러 따뜻한 차를 받아가게 하셨다. 15년이 지나 찾아 본 학생기록부에는 지난 선생님들과는 압도적인 분량으로 내 성품과 재능을 칭찬해 주신 기록이 있다. 심을 다한 조언, '흙이 묻으면 털면 그만'이라는 말 한 마디가 삶 가운데 위로가 되었다.


덕분에 늘 정석을 택했던 내 선택은 가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스릴을 향한다. 대부분 관성에 따라 다시 방향을 돌리지만 마음은 은밀히 발동을 건다. 그렇게 내 무미한 삶 릇한 재미가 듬성듬성 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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