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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숨 Apr 18. 2022

너는 내 '반'인걸

그냥 쉬고 싶었을 뿐이다. 눈도, 입도, 정신도.

하지만 운전 중이던 남편은 옆에서 아무 말도 없는 내가 계속 신경쓰였다.

"왜 그래?"

"응? 왜?"

"기분이 왜 안 좋아?"

"아닌데. 괜찮은데."

그래. 사실 즐겁지는 않았다. 약속된 시간에 늦을 듯한 이 상황 때문 심장이 쿵쿵대고 가만히 차에 앉아 있는 것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남편이나 나의 잘못은 아니었기에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약속 시간에 안전히 도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한 내 마음은 계속 불편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열심히 액셀을 밟고 있는 남편에게 뭐라 말하랴.

"왜에에. 왜 기분이 별로야아아."

괜찮다는데도 계속 추궁하는 남편에게 투정 부리듯 말했다.

"아이 참. 여보는 너무 예민해."

"내가? 0.0" (세상 무던해서 타칭 곰, 보살, 성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나한테 너무 예민해. 그냥 날 내비둬어어."

그 말을 들은 곰은 입을 열었다.

"여보한테 주는 관심을 멈출 수는 없. 내 반인데."




둘 다 앞만 보고 가는 차 안에서 종종 내가 벙찐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는 순간이 발생한다. 생각지 못한 말로 내 심장이 쿵 울리는 순간. 지각할 위험에 놓여 너덜거리던 심장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순간.


남편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 "위 아 원 바디". 매일 들어서 큰 감흥이 없었는데 그 말이 이렇게도 번역될 수 있구나. 같은 말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와닿으니 말이란 참 신비롭고 그래서 조심스럽다.


꼼짝없이 앉아서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차에서는 사람의 감정이 날로 표현되기 쉽다. 더군다나 나는 기분이 안 좋으면 우선 생각이 복잡해져 말이 없어진다. 복잡한 생각의 과정을 대략 설명하자면,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우선 원인을 파악해야 하고(원인조차 모를 때가 제법 많다), 이유를 알아냈다면 금 내 감정이 그 상황에 적절한지 검열한다. 그런데 주로 내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 감정을 인정하면 내가 치졸해지거나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 므로.) 그러면 기분은 안 좋지만 이걸 표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니 어떻게든 이 기분을 없애야 한다. 하지만 남몰래 내 감정을 해결하는 것에 서툴러서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결국 부정적 감정이 새어나오고 부적절하게 드러난 내 기분은 남을 불편하게 한다.

오늘도 그랬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난 지금 지각할 위기에 놓였고 나 대신 남편이 빠르게 운전하는 것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 중이나 내 초조한 마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내 무거운 입은 차 안의 공기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데 남편이 이 분위기에 짓눌린 것이다.

눈치를 많이 보고 자라서 눈치보게 하는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보는 나인데 또 희한하게 눈치보게 만드는 능력이 내게 탑재되어서 남편이 종종 피해를 본다.

그런데 타칭 곰, 보살, 성자인 남편은 얼어붙는 장내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전환시키는 능력이 있다. 나에게만 발동하는 예민함으로 주로 우리 관계에서 발현된다는 한계가 있지만.



아까 백만 단위가 넘어가는 숫자를 3초만에 산수하는 내 ‘반’님에게 “여보는 이과를 갔어야 했어.”라고 말했지만 아니, ‘반’님은 언어능력이 출중한 것 같다. 말 한마디로 한껏 높아진 내 긴장 수치를 서서히 내리고 급격히 차가워진 마음을 금세 덥힌다. 앞으로도 그 언어 센스 잘 배울테니 수시로 발휘하길 바란다.

그러려면 내가 자주 ‘반’님을 눈치보게 해야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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