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니가 40대 초반일 때의 일이다. 언니와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있는데 열 살 차이였더란다. 그 지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님만 계셨는데, 어느 날의 지인의 부친상 연락을 받고 언니가 부랴부랴 조문을 갔단다. 그런데 지인이 빈소에서 언니를 붙잡고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하는 말.
"나는 이제 고아야.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어. 엉엉~~"
서글피 우는 지인의 손을 붙잡고 같이 울어줬지만, 그때 부모님이 두 분 다 살아계셨던 언니 입장에서는 '엄청 슬프겠지만 나이 50살에 고아라는 표현은 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단다.
그런데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내가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 때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부모가 없다는 게, 정말 세상천지에 나 혼자인 고아 같다고.
책이나 영화를 통한 간접경험으로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지만, 간접경험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 있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그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조문을 가서 지인을 위로할 때 '슬프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상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슬프고 황망할지 감정이입되어 남의 장례식장 가서 지인을 위로하다 내가 울고온다....
가깝지도 않은 분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게 이상해보일 것 같아 최대한 눈을 끔벅이며 참아보려 하지만, 부모를 여의고 앉아있는 상주의 모습에서 과거 내 모습이 겹쳐보여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린다.
가까운 직장 동료가 부친상을 당했다. 장례식장이 부산이라니... 잠깐 '그냥 부의금만 보낼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옆을 지켜주는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기에 하루 휴가를 내고 다녀왔다.
7월 말의 부산은 이글이글 덥고 습했다. 부산역에는 들뜬 표정의 외국인과 여행객들이 가득했다. 설렘과 행복함, 즐거움이 가득한 분위기의 그들을 헤치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한참 달려 도착한 장례식장의 낯선 풍경 가운데 익숙한 얼굴의 직장 동료가 서있다.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라, 이제는 편하실 것 같다며 차분한 얼굴로 지인이 말했다. 이번에는 나도 울지 않고 지인을 잘 위로하고 왔다.
어쩌면 이제 주변 지인들의 이별도, 우리 아빠의 부재도 조금씩 익숙해지나 보다.
엄마가 새로 옮긴 요양원은 내가 사는 곳과 2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첫 요양병원은 내가 사는 도시에 있었고, 나 외에는 주말에 면회할 사람이 없어 의무감에라도 매주 갔다. 그러나 두 번째 요양원은 거리도 먼 데다 엄마가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에 걸려 격리하는 바람에 한동안 찾아가보지 못했다.
엄마를 몇 주째 못 봐서 마음 한 구석은 걱정스럽고 미안한데, 한 편으로는 주말 내내 쉴 수 있어 몸이 편하다. 전화할 때마다 자식들한테 '언제 오냐'라고 묻는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여유롭고 편한 주말에 감사하는 스스로에게 죄책감도 느껴진다.
이제 엄마를 손주들을 헷갈려하기 시작했다. 아직 자식들은 기억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우리를 알아보고 다정하게 불러줄지 모르겠다. 지금은 엄마가 우리를 반가워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엄마를 만나고 오는 길에 마음 한 켠이 든든해지지만, 나중에 엄마가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하면 엄마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기나 할까?
옛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는데, 갈수록 나의 시간과 일정을 핑계로 엄마를 덜 챙기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사춘기인 아이가 나와 거리를 두려하는 게 섭섭해서 아이 주위를 뱅뱅 돌다가, 멀리 낯선 곳에서 오늘도 혼자 잠들 엄마가 생각나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