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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한시 Aug 30. 2023

엄마의 일기장에서 발견한 충격적인 한 줄

엄마가 이렇게 냉철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지

요양원에 들어가신 엄마의 집을 두어 달 전에 정리했다. 이제 엄마가 다시 이 집에 돌아와서 사실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 엄마가 20여 년 넘게 사셨으니 구석구석 엄마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 집을 언니들과 정리하면서 많이 속상했고, 또 외로워졌다. 내 마음이 힘들 때 언제든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엄마아빠도, 집도 없어져서...


집을 정리하다가 안방의 화장대에서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의 기억력이 조금 떨어지는 것을 걱정할 무렵이었다. 치매 초기일까 염려되어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아빠의 부재로 우울한 것 때문에 기억력이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일기를 써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그때부터 엄마가 하루에 한 두 줄씩 간단하게 일기를 적은 모양이다.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글로 적어놓은 걸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우리 엄마는 참 긍정적인 사람이다. 

집에 갈 때 소소한 선물 하나 들고 가기만 해도 "고맙다"고 기뻐해주시고, 우리가 다녀가면 "먼 길 왔다가느라 고생했다"고 고마워하신다. 엄마에게 가는 길에는 항상 아빠의 산소를 들렀는데, 나로서는 아빠에게 인사하러 가는 일이니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인데도 엄마는 그것조차 고마워하셨다. "매번 아빠 찾아가서 아빠가 참 좋아하시겠네. 우리 OO이 밖에 없네"라며 기특하다고 이뻐해 주셨다.


엄마의 일기장에는 엄마답게 고마운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아빠 돌아가신 후 언니네랑 엄마를 모시고 첫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한사코 여행 가기 싫다는 엄마를 겨우겨우 설득해서 모시고 갔는데, 막상 가셔서는 즐겁게 잘 보내셔서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엄마도 그랬다니 다행이다.


'오늘은 여행 가는 날. OO(언니)네 식구와 OO(나) 가족과 필리핀 나라로 밤비행기를 타고 10시 반 비행기를 타고 출발. 목적지는 필리핀 세부에서 하루 저녁 머물고, 아침 보홀로 출발하였다. 4박 5일 일정으로 갔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너무나 즐거웠다. 모두 자식들 덕분에 너무나 감사했다. 우리 자식들...'


아빠 돌아가신 후 엄마는 조금 우울했는지 우리가 여행 가자고 하면 귀찮다고 싫다고만 하셨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여행을 즐기게 되신 것 같다. 매년 두세 번은 엄마를 모시고 온 가족이 모여 여행을 했는데, 엄마는 여행에서의 문제를 불평하거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없었다.

 

'너무나 고마운 내 자식들. 너무 고맙다, 자식들... 

다음날) 아침 먹고 바닷가에 놀다 다들 집으로 왔음. 좋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애들아 사랑해'



우리가 모여 왁자지껄 놀다가 엄마를 혼자 남겨두고 떠날 때면 걱정이 되었는데, 엄마가 남긴 글귀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OO(나) 가족이 점심 먹고 떠났다. 허무하다'




가끔 아빠에 대한 그리움도 묻어났다.


'애들과 함께 명절 분위기는 있지만 그래도 당신 생각이 많이 난다. 그 땅에서 항상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면서 기도할게'



제일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구절.


'서방님한테 꽃선물에 갔다 왔음'


'내 생일이다. 서울 OO (언니) 가족이 새벽 출발해서 아침 일찍 찰밥, 미역국으로 준비해서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 너무나 고맙고 사랑하는 내 딸 가족. 사랑한다. 나는 서방님 산소에 다녀왔다. 너무나 가슴이 무겁고 마음이 아프다. 너무나 아까운 내 당신. 사랑합니다'




여느 부모처럼 자식들에 대해서는 항상 걱정과 고마움 뿐이다.

남동생이 위궤양이라니 '마음이 아프다'고 표현하셨다.


'OO(남동생)가 위내시경했다. 결과는 위궤양이다.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다 어느 한 구절을 발견하고는 언니들과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렸다.


'농협 게이트볼 대회 열림. 희망은 없음'


아니, 엄마... '희망은 없음'이라니요... 우리 엄마가 이렇게 메타인지가 잘 되는 사람일 줄이야.


엄마는 게이트볼 대회를 자주 나가셨는데, 사실 순위권에 드는 일이 적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가 이렇게 '희망은 없다'고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신 게 웃기기도 하고, 의외로 냉철한 면의 엄마를 발견한 것 같아 새로웠다.

 


글이라는  참 엄청난 힘이 있다. 아무리 달콤하고 좋은 말도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고, 그때의 감정 또한 희미해져 가는데 글은 다시 읽을 때마다 그때의 마음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또 말은 대면이든, 통화로든 상대방과 접촉이 필요하다 보니 감정 표현이 걸러지고 다 표현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는데 글은 내 마음 가는 대로 적다 보면 마음에 있는 말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글과 별도로 글씨체 역시 그 사람을 보여주는 좋은 매체이다. 글씨체에 따라 사람의 인상도 바뀌지 않는가. 글씨체가 단정하고 멋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글씨체 자체는 그 사람의 하나의 특성이 된다. 그래서 엄마의 손글씨로 적힌 일기장을 보면 글귀 하나하나와 함께 글씨체에서 묻어나는 엄마의 마음이 전해져 와서  더 엄마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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