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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의여명 Oct 05. 2022

인간이 쏘아 올린 로켓은 무엇이 되어 돌아오는가?

Koyaanisqatsi (1982) - Godfrey Reggio



발음도 어려운 '코야냐스카시 Koyaanisqatsi' 호피족 인디언의 말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지만, 영화의 부제는 그 세 번째 의미인 life out of balance, 균형이 깨어진 삶이다. 당연히 극영화는 아니다. 실험영화, 영상미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명확한 의도가 드러나고,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내러티브가 부족하다. 영상시라고 하기엔 너무 날 것 같이 느껴진다. 뭔가 성명서나 선언문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 규정하기 어려운 영화는 40년 전 1982년 10월 4일 뉴욕의 라디오시티에서 5000명에게 처음 보인 이후로 전 세계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해 댄 영화다. 감독인 갓프리 레지오라는 사람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유명한 필립 글라스의 음악을 탑재하고, 긴 시간 동안 지구가 만들어낸 것들의 이미지와 인간의 만들어낸 것들의 이미지를 나열하였다. 가공하지 않은 이미지들은 영화의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그 순서와 속도가 달라진다. 이런 이미지의 충돌 사이에 관객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질문을 하고 거기에 자신의 해답을 찾는다. 대사 한 줄 없는 영화인데, 프레임 사이 숨은 질문들은 참으로 날카롭고 아프다.


사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83년이야 모두 다 극장에서 봤으니, 영화가 불만인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벌떡 일어나서 걸어 나오는 것 정도뿐이지만 지금이야 우리에겐 pause의 자유가 있다. 화면 속에 나를 잡아두는 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지적 호기심뿐이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 이미지와 음악에서 의미를 찾고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몇 번이고 dvd를 뒤로 돌려야 했었다. 소개글을 쓰기 위해 새로 볼 때도 마찬가지. 그러고 보니 이 영화를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보기 위해서는 극장이 필요하겠다. 아니면 내 몸을 묶어 둘 밧줄?

영화의 마지막까지 작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작가는 친절을 베풀었다. 영화 제목의 정의와 함께 영화를 관통하는 스토리에 대한 단서인 호피족 벽화 속 예언을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인간 언어의 형태로 넣어두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넣은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우리는 작가의 의도 따위에 휘둘리는 세대가 아니니까.... 소개해 본다.


If we dig precious things from land, we will invite disaster
Near the day of Purification, there will be cobwebs spun back and forth the sky
A container of ashes might one day thrown from the sky, which could burn the land boild the oceans
우리가 땅에서 소중한 것들을 캐낸다는 것은 재앙을 초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화의 날이 오면 거미줄이 하늘을 덮고
하늘에서 재를 가득 담은 것이 떨어져 땅을 태우고 바다를 끓일 것이다

호피족 인디언의 예언 - 코야나스카시




이 영화를 보면 이 호피족의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터넷의 그물이 하늘을 뒤덮은 지 오래고, 하늘에서는 이미 우리가 쏘아 올렸던 많은 것들이 떨어져 땅을 태우고 바다를 끓였다. 아니 아마 지금도 끓고 있으리라. 주위를 돌아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영화가 나온 지 40년, 속도는 더 빨라졌다.



영화 끝에 Koyaanisqatsi의 여러 뜻을 알려준다. 1. 미쳐버린 삶 craxy life 2. 혼돈의 삶 Life in turmoil 3. 균형이 깨어진 삶 Life out of Balance 4. 분해되는 삶 life disintegerating 5. 다른 방식의 인생이 요구되는 삶의 단계 a state of life that calls for another way of living



이 중에 나는 5번째 의미에 눈이 간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마지막에 남은 뜻에 희망이 보인다. '다른 방식이 요구되는 삶의 단계'라니,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삶의 변화가 요구되고, 그렇게 변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는... 결국 이 것이 감독이 의도하였든 아니든,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해야 변화하면 내일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뜬금없는 덧글 1


비위가 약하거나 멀미가 심한 분께는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굳이 보셔야겠다면, 멀미약 드시고 가능한 작은 화면으로 보시길...)



뜬금없는 덧글 2


카시 삼부작이라고 부르는 세 편의 영화가 있다. 모두 갓프리 레지오가 연출하고 필립 글라스가 음악을 맡은, 대사 없는 논버벌에 충돌하는 이미지와 음악만으로 구성된 이 세 영화, 83년에는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던 영화가 2002년에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여전히 스토리가 전달되는 방식은 놀랍다. 

《코야니스카시: 균형 잃은 삶(Koyaanisqatsi: Life out of balance)》(1983년)

《포와크카시: 변형 속의 삶(Powaqqatsi: Life in transformation)》(1988년)

《나코이카시: 전쟁으로서의 삶(Naqoyqatsi: Life as war)》(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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