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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의여명 Jul 29. 2022

적인가 친구인가?

해프닝 (2008) - M. 나이트샤말란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나뭇잎이 소리를 내고 나면 누군가는 바닥에 쓰러진다. 영화 속에선 설명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두려움에 떨며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지만 안전한 곳은 없다.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맞서 싸울 수도,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 것이 전부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하기 시작하는데, 그 누구도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가스를 이용한 테러라고 발표하지만, 아무도 제가 벌인 일이라고 명분을 걸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 이 영화를 누군가는 공포영화로 보고 누군가는 스릴러로 본다. 누구는 가족영화로도, 재난영화로도 분류한다. 이 영화 속 현상을 설명하는 말은 단 하나,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는 것뿐.


The Heppening (2008) - Official Trailer

반전영화의 고전이 된 ‘식스센스’라는 영화 한 편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M. 나이트샤말란 감독의 8번째 영화이다. 제목인 ‘the Happening’은 우연히 발생한 일,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의 단어. 그러니까 영화 속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그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의도가 없이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왔던 감독이 드디어 식물들에게 그 눈을 돌린 것 같다. 사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그들의 세계는 너무나 조용해서 그들의 힘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긴 하다. 최소한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의미를 가진 영화라는 매체에서 그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식물들이 주인공이 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최소한 말을 하고 움직이는 반지의 제왕 속 엔트 정도는 되어야 영화 속에서 중요한 캐릭터로 기능할 수 있었다.)


'반지의 제왕' 속 엔트 - 나무에 팔과 다리를 달아야만 감정이입이 가능할까?


물론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고, 마크 월버그와 조이 디샤넬이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고 볼거리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소리가 이렇게 위협적으로 들린 적이 또 있었을까? 원인도 알 수 없고 실체도 보이지 않는 너무나도 우아한 공격이 이렇게 공포스러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숲을 공부하는 사람의 시각에서 출발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기로 한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줄 수 없지만 그동안 주워들은 생리학적, 생태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답을 생각해 보려 한다.


불온한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고 나면 일정 반경 안의 사람들은 멈추어 서서 '자살'한다. 왜 ‘자살’일까? 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독성물질을 갖고 있다. Phyton (식물) + cide (죽이다)라는 이름 그대로 자신을 공격하는 세균과 미생물, 곤충들을 공격하는 휘발성 물질인 '피톤치드'다. 나무는 다른 생물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영양을 만들어내어 생활하는 독립영양생물이다. 끊임없이 공장을 돌려 탄수화물을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살아간다. 당장 먹고살기 위한 탄수화물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이들에게 피톤치드와 같이 복잡한 구조의 지방성분을 기반으로 하는 성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 낸 피톤치드의 효과는 인간과 같은 거대한 동물의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도 미비하다. 심지어 인간들은 이렇게 나무들이 사활을 걸고 만들어내는 피톤치드를 제 편할 대로 '산림욕'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한다. 나무 한 그루가 만드는 피톤치드의 양인 정해져 있고, 이런 인간들을 공격하기 위해 갑자기 피톤치드의 농도를 급격하게 올리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무들이 가진 휘발성 물질을 가지고 가장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화학구조를 조금 비틀어 향정신성 물질로 만들면 어떨까?  인간은 의외로 정신 공격에 취약하고, 이런 경향은 물질문명이 이끌어가는 현대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아마도 나무들은 그동안 조금씩 시험해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유 없이 죽어있던 작은 동물들과 숲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그들의 실험 대상이 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조나단 리빙스턴과 같이 꿈꾸던 나무 한그루에서, 전봉준 같은 혁명가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른다.


나무는 의사소통을 한다. 곤충들에게 공격받기 시작한 나무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주위 나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들이 공격과 방어를 위한 피톤치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 영화 속에서 공격하는 지역이 이동하고 확장될 수 있는 이유이다. 분노는 전염성이 강하다. 아마도 동조한 나무들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분노가 아니라도 좋다. 불안과 고통으로 구석에 몰린 나무들이 반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순간적으로 흥분한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무들은 공격했고,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왜 시작되었는지 만큼이나 왜 혹은 어떻게 중단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 크게 남는다. 갑자기 조용해진 나무들은 이젠 더 이상 바람에 공격을 실어 보내지 않는다. 이것으로 끝일까? 더 이상의 공격은 없는 것일까? 갑자기 공격성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평화주의자 나무들이 반대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꾹꾹 눌러 담아 만들어 내었던 공격물질들이 단순히 고갈된 것뿐인 것이 아닐까? 그렇게 공격은 중단되었으나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 소리에 움찔한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이제 시원하게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는다. 숲과 공원에서 우리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던 친구 같았던 나무들은 이제 적으로 돌아섰다. 초록은 더 이상 평화의 색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륙을 건너 유럽에서 공격이 시작된다. 북미의 나무들이 발견하여 만들어낸 전략이 혹은 지식이 어떻게 대서양을 건너 이동한 것일까? 나무들이 가진 의사소통의 수단이 공격성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인가?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는 이마니시 이론에 입각한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순서일 지도 모르겠다. 유럽의 나무들이 확보한 공격 방식은 북미의 것과는 다를 지도 모른다. 좀 더 직접적으로 인간의 신경계에 혹은 특정 근육에 작용하는 공격 방식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겠다. 속편을 내지 않은 감독의 마음 속에는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을 지도...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식물은, 나무는 우리에게 아직 알 수 없는 대상이고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용 방법이 있는 식물은 착취하고 쓸모없는 건 없애버린다.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진화의 방향이 그 방향으로 맞추어져 그들의 분노가 이러한 방식으로 폭발한다고 해도 이해할만한 일이다. 단지, 그날이 온다면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라는 것을,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을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알 수 있다면 좋겠다.




뜬금없는 덧글 1.

나무들의 반격을 보고 있자니, 초본의 공격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지 궁금해졌다.

양치식물은, 선태식물들의 공격 방식은 어떨까? 지구의 수많은 생물들 사이에서 인간이 이만큼이나 우위를 점하고 수천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라 느껴지는 순간이다.


뜬금없는 덧글 2.

진화의 방향이 식물에게 운동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상상하는 방식으로 뿌리를 뽑아내어 걸어다는 나무의 모양으로 전개될까? 아니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방향을 찾는 덩굴식물들 마냥 성장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땅 위쪽에서 가지와 줄기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행될까? 그것도 아니면 천녀유혼 속 나무귀신의 그것처럼 나뭇잎과 가지의 신장과 수축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가게 될까? 움직이는 식물과는 의사소통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상상이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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