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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의여명 Aug 02. 2022

지금도 숲에 갈 때마다 찾고 있습니다

이웃집 토토로 (1988) - 미야자키 하야오

내가 대학에 입학한 90년대 후반은 아직 일본문화에 대한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일본문화는 그 나름 최고의 주가를 날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문화비평을 공부한답시고 여러 대중문화를 장르별로 찾아보고 뜯어보고 하던 시절 애니메이션은 거의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와 동일시되었고, 우리는 배덕감과 치기 어린 우월감, 반항심과 열등감을 적당히 학구적인 자세로 포장한 채 몇 번이고 복사되어 아주 조악한 화질을 가진 비디오 화면으로 자막도 제대로 입혀지지 않았던 아키라, 공각기동대 같은 전설 같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삼삼오오 모여 보았다.

 

2001년 포스터  vs. 2019년 재개봉 포스터

어린이 명작동화 시리즈, 빨간 머리 앤, 미래소년 코난과 같이 TV 애니메이션으로 모르는 채 익숙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도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접하기 쉽지 않았다. 환경이라는 주제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던 시절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날이 서 있던 우리에게는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말랑거려서, 조금 덜 공격적이고 덜 급진적인 이야기라 그랬는지 지금 와서 그 이유는 적당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학교 앞에 이웃집 토토로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같은 애니메이션의 포스터와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있던 작은 술집이 있었다. 아직도 그 술집의 사장님이 지브리 덕후였는지 어땠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때 쌓여가던 소주병들과 자욱한 담배연기 뒤로 보이던 포스터 속 세상 순수한 어린 메이와 신비로왔던 토토로의 숲이 이 영화와 관련한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1950년대 초 일본의 시골을 배경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 속 토토로는 숲의 정령이다. 어린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토토로와 친구가 된 어린 메이, 그리고 메이의 언니 사츠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펼쳐진다. 아픈 엄마와 바쁜 아빠,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언니 사츠키와는 달리 온전히 제 손에 세상 모든 시간이 주어진 메이는 자연스레 주변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궁금하다. 제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현실인지 아닌지 구별 짓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신기한 것들을 쫓다 보면 하루가 끝이 난다. 그렇게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애니메이션 속 시골 마을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판타지이다. 마당을 나서면 만나는 빛나는 자연. 떨어지나 했으나 항상 내 눈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도토리들은 챙겨가는 이들이 따로 있었고, 숲 속의 오솔길은 종종 분명히 지나왔는데 찾을 수 없는 숲길들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의 옹이 속에는 정령이 살고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같은 공간을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한 인프라도 마련되어 있다. 번쩍이는 눈의 고양이 버스가 얼마나 타고 싶었는지…

 

단순하게 이건 모두 판타지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다시 본 애니메이션 속 풀과 나무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메이의 앞마당에는 질경이도 보이고 개망초, 머위, 닭의 장풀, 제비꽃, 고사리도 보인다. 그리고 토토로가 사는 커다란 나무는 영험한 녹나무라고 한다. 숲과 자연에 대한 지식이 더 깊고 넓은 사람들의 눈에는 더 많은 풀과 나무들이 보이겠지. 이렇게 너무나 환상적인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인 배경 위에 펼쳐진다. 이곳, 맘먹고 찾으면 꼭 있을 것만 같은 장소다.

 

일본에서 개봉할 때의 캐치프레이즈가 '이 이상한 생물은 아직 일본에 있답니다. 아마도' 였다고 한다. 그런데 원안은 '이 이상한 생물은 이제 일본에 없습니다.'였다는데, 아마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홍보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마케팅 담당자의 의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망가져가는 환경을 생각해 보면 '없습니다' 쪽이 좀 더 현실에 가까울 것 같지만, 지금도 숲에 들어가 사람이 다니는 것 같지 않은 길을 보면, 혹시라도 흐릿한 몸을 하고 내 앞을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어린 토토로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는 건 저 마음 한 구석에 아직 남아있는 내 어린 마음의 조각일까?

 

넷플릭스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모두 올라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들 중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생태주의적 주제를 가진 작품들은 크게 아름다운 자연을 찬양하고 그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동행을 이야기하는 '이웃집 토토로', '벼랑 위의 뽀뇨'와 같은 영화들,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원령공주'와 같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영화들로 나눌 수 있겠다. 절절하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경고하는 영화들을 반성하면서 볼 수도 있겠지만, 경고는 다음에 듣고 오늘은 동심으로 돌아가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의 눈으로 숲을 지키고 있는 '이웃집 토토로'를 한번 만나보는 건 어떨까? 흐릿하게 움직이는 모든 숲의 정령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다 보면 다음 숲 나들이에서 스쳐 지날 수도, 알아볼 수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이제는 멀어져 버린 인간들과 숲이지만, 우리가 다시 가까워지도록 열심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잃지 말자. 이 다정하고 푹신하고 말랑말랑한 숲의 정령을…


 


뜬금없는 덧글 1.

영화 속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만큼이나 유명한 ‘마쿠로 쿠로스케’, 빈집을 지키는 먼지귀신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이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스스와타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빈집을 지키다 사람이 이사 오면 나간다는 마쿠로 쿠로스케, 영화를 다시 본 뒤로 끊임없이 드는 생각은 ‘왜 우리 집에는 사람이 사는데도 먼지귀신이 있는가’하는 문제였다. 우습게도 20년 전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전혀 들지 않았던 생각이라 웃으면서 보았다. 역시 메시지의 의미는 적극적인 청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했던 고래적 기억을 소환해 본다.

 

뜬금없는 덧글 2.

토토로가 일본에만 사는 숲의 정령이라고 한다면… 한국 숲에 계신 분은 누구인가?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의 숲에는 산군이라 불리는 범들이 살았고 그들은 인간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현실의 존재였다. 산과 숲에 깃든 신령한 존재라고 하면 시목, 성황목, 정자목 등으로 불리는 크고 오래된 나무에 깃든 정신이나 어떤 연유로 돌이 되어 그곳을 지키고 있는 존재들도 있겠다. 그중에 가장 숲과 산을 전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산신령일까? 산군을 거느리고 숲과 산을 책임지는 이가 산신이라고 한다면… 정말 한국의 토토로는 산신령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멋있으시지만, 다정하고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이를 만나고 싶을 땐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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