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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의여명 Feb 07. 2023

갈림길 위 다른 길을 선택한 나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걷기 좋은 날(2015) - 박용주





선택의 갈림길에서 헷갈리는 이유는 또 다른 나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랬다.



분명히 이런 영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았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 다큐멘터리 몇 편 사이에서 발견한 극영화였다. 2015년에 만들어져 영화제를 전전하다 2018년이 되어서야 개봉을 할 수 있었던 작은 영화, '나를 찾아가는 힐링여행'이라고 하는 약간 유치하게 느껴지는 캐치프레이즈가 포스터에 걸려있는 독립영화, '걷기 좋은 날'이다.




우리는 쌓아 왔던 것들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삶의 방향을 전환하도록 만든 특별한 계기가 있어 그들이 지금 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다시 말하면 내가 그 길을 가지 않는 이유는 그런 특별한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자기 위안. 그렇게 영화 속 주인공인 상욱은 말기암 선고라고 하는 특별한 계기로 인해 제주의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부모들이 바라는 삶을 살아온 상욱이 길을 벗어나는 계기는 그렇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 길을 벗어난 상욱은 그동안 숨어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이겠다.



굳이 올레길 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는 지도 모른다. 마침 말기 암 선고를 받은 뒤 충격이 가시기 전 출장을 가 있던 곳이 제주이었고, 그곳엔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상욱도 그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곳이 하동이나 구례, 남원이었으면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을까? 네팔이나 티벳이었으면 히말라야 어디메를 헤매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에 걷기만큼 좋은 이동수단이 있을까? 그렇게 상욱은 '걷기' 시작했다.




상욱이 걷고 있는 길을 따라 곳곳에 올레길 사인과 조형물들이 있다. 걷다 보니 산도 있고 숲도 있고 초지도 있고 항구도 있다. 해도 달도 바람도 있었고 하늘도 보이고 바다도 보였다. 아마도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일 것이다. 보였으나 의미가 없었던 것들 일 수도 있다. 의미가 있었으나 사무치지 않았던 것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양복을 벗어던지고 아웃도어매장에서 장비를 갖춘 뒤 길에 올랐다. 그렇게 숲과 산과 초지를 통과한 상욱은 변화의 길에서 1점의 점수를 얻으며 출발한 것 같았다.



영화는 상욱이 한 밤중에 숲 속 길을 걸으며 축구경기를 보다 사고를 당해 누워있는 시점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이동하며 보여준다. 거칠고 친절하지 않는 편집 때문에 처음엔 정확한 시점을 파악하기 어려워 조금 당황스럽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진다. 인간은 그렇게 쉽게 무언가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다. 과거의 상욱 또한 암 선고 전과 후로 다른 사람이 된다. 제주에 와서도 행장을 차려 올레길에 오르기 전과 후의 상욱은 또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상욱은 조금씩 다른 상욱이 되어갔다.







영화 속에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 녹아 있다. 녹음이 짙은 숲 속을 걷고 있는 마치 광고 이미지와 같은 상욱의 모습도 종종 보인다. 나뭇잎을 통과하는 빛과 바닷속으로 잠수 중인 해와 같이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인적 드문 해변과 항구, 사람 없는 갤러리와 무인 카페, 녹슨 배를 수리하는 작은 조선소 같이 인간과 자연의 콜라보로 만들어진 '아름다운'인공의 모습도 무심하게 펼쳐진다. 그렇게 무심한 아름다움을 통과해 상욱의 다른 모습을 끌어내는 것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였다. 영화의 중간 즈음, 기대했던 것만큼 제주와 올레길의 자연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 거대한 생태계 속,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 생각났다. 혼자 걷는 상욱은 숲을 통과하고 있었고, 상욱의 마음속을 헤집고 숨어 있던 또 다른 상욱을 대면하게 하는 거울이 되어준 것은 그가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상욱과 같이 숲을 통과해 올레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주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제주에서 꿈을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상욱의 거울이 되어주었던 사람들이 길의 일부분이었고 숲의 일부분이었는 조금 억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상욱이 숲을 걷고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인연들, 숲과 길이 내어주는 넉넉함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



사고 이후 삶에 대한 의지를 찾고는 사람들이 지나는 곳까지 기어 나와 구조된 상욱을 만나러 결혼을 약속한 해민이 날아온다. 암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 상욱을 두고 해민은 혼자 귀경한다. 영화의 첫 장면, 걷고 있는 해민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상욱의 노트이다. 살아있는 상욱이 그녀에게 준 노트인지, 죽은 뒤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노트를 따라 상욱이 걸어간 길을 뒤따르며 그가 만난 사람들과 만난다. 그 과정에서 해민이 만나게 되는 것이 또 다른 상욱일지 아니면 또 다른 해민일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해민이 걷기 시작한 그날도 참 '걷기 좋은 날'일 따름이겠다.



뜬금없는 덧글 1

아무래도 독립영화라 그런지 배우들의 연기가 좀 어색하다. 특히 상욱 부모님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움직이는 관절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이렇게 미숙하고 불편한 연기는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여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자꾸만 머릿속에 다른 소리가 들린다. 영화를 보는 '나'의 목소리이다. 이 '나'의 목소리는 배우의 연기를 평가하고 영화를 평가한다. 영화 속 캐릭터를 분석하고 나와 비교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그런 의도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그 표현이 효과적인지, 그리하여 나는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빈틈이 있는 영화를 볼 때 내 머리는 더 많이 움직인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 내어 나를 푹 빠지게 만드는 영화들을 볼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거리두기'보다 조금 더 흥미진진하다.



뜬금없는 덧글 2

영화를 보고 올레길 비박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생각보다 올레길을 걷다 비박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왠지 비박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전이든 환경이든 어려가지 이유로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올레길의 환경을 해칠 정도로 비박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그래서인지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과 제주도민들 모두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비박을 위해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짐의 무게는 10-15kg 정도, 여행을 하는 동안 숙소에서 사용하는 물과 세제, 전기 등을 생각하면 비박은 오히려 준비만 잘하고 흔적만 남기지 않는다면 훨씬 친환경적일 수도 있겠다. 한 번도 제대로 걸어보지 않은 올레길, 비박을 하며 다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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