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숲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에서 숲 속 나무의 이야기, 풀의 이야기, 균류의 이야기, 곤충의 이야기, 흙의 이야기, 새와 동물들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영화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물과 태양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눈의 뜨인 영화, '물의 기억'이다.
물을 쳐다보면 물도 당신을 쳐다봅니다. 물은 모든 것을 기억하며, 흐르고 싶어 합니다.
라는 문장이 영화의 머리에 박혀 있다. 물이 가진 물성을 생각해 보게 하는 문장이다. 물을 보면 내가 보인다. 나를 보는 내가 물속에 있다. 그렇게 물은 모든 것의 모양을 담아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기억을 담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형태를 바꾸어서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이 지구 한구석, 대한민국의 하천, 공장 폐수로 죽어버린 줄 알았던 화포천에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생명을 품어 흐르게 하는 물과 그 물이 기억하는 것들에 대한 짧은 스케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100분은 지구의 물이 담고 있는 기억에 비하면 찰나에도 못 미치는 시간이므로 영화를 얼마나 길게 만들든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감독, 이 영원과도 같은 지구의 기억을 품고 있는 물의 기억을 100분 안에 녹여내려고 하다니, 어마어마한 야망을 품고 있는 분이시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다.
먼저 형식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큐멘터리의 화법을 따르지 않는다. 내레이션이 깔리고 엄청난 촬영 기법과 기기들이 사용된 초근접 샷들을 보면 다른 자연다큐멘터리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계절마다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이야기는 자료화면도 기록화면도 아닌 연출된 장면들이다. 보통 그런 극화된 장면이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때는 '여기서부터는 극화입니다'라고 말해주는 장치들이 들어간다. 여기서는 딱 '1950년대 중반'이라는 짧은 자막 한 줄 뿐이다. 그것도 영화 전체를 통해 산발적으로 삽입된 장면 중 첫 장면에만 들어있다. 아직 영화의 전개방식에 대해 관객이 알아차리기 전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 마다 지나가는 자전거를 탄 이의 모습은 그 아이를 돌아보는 지금은 돌아가신 이의 환영이다. 이렇게 혼재하는 장르의 연출이 최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아무런 시각적인 실마리 없이 현재와 먼 과거 그리고 가까운 과거의 시점이 섞여서 진행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요 캐릭터가 봉화마을과 화포천이고 그 마을을 사랑하여 그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 정치적 성향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남긴 한 문장이 환경을 고민하고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세기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망가지고 있는 환경에 대한 원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어릴 때 개구리 잡고 가재 잡던 마을을 복원시켜서 아이들안테 물려주는 것이 제일 좋겠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다음 세대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쌓아온 빚을 물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영화를 통해 우리는 김명곤의 내레이션을 통해 봉하마을 '논'의 사계절을 만난다. 그리고 그 '논'에 생태계를 만들어 내고자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봉화마을에 '생명농법'을 소개하고 '생태 습지 정화'를 주창하는 자료화면과 함께 그 시도가 만들어내었던 논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이 땅에 갇히면 논이 된다. 이 논에 갇힌 물의 세상에 살고 있는 풍년새우, 물벼룩, 긴꼬리투구새우, 모기유충과 같은 물속 곤충들과 개구리, 두껍이, 유혈목이, 드렁허리, 미꾸리와 같은 어류와 파충류, 그리고 그들의 포식자인 황새까지, 작은 논 안팎에서는 변화화는 계절과 함께 끊임없는 생명의 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모두 농약을 뿌리지 않은, 생태계가 살아있고 순환이 계속되는 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논에 던져 넣어진 우렁이와 오리가 이 논의 생태계를 농약 없이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 물은 또한 볍씨를 만나 말라붙은 볍씨를 깨운다, 뿌리에서 흡수된 물은 필요한 양보다 과한 경우 식물이 뱉어 내기도 한다. 물과 비옥한 땅이 있는 논의 가장자리는 재배하지 않는 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이라 그들 간 경쟁이 치열하다. 환삼덩굴과 박주가리, 메꽃 등으로 가득한 논두렁의 잡초들은 호시탐탐 풍요로운 논을 넘본다. 농부가 마냥 왕우렁이와 오리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만은 없다. 논 아래 비옥한 양분과 논을 채우고 있는 물, 그리고 가릴 것 없이 쏟아지는 햇빛은 그들이 언제 베일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논두렁을 버릴 수 없는 이유다.
논을 둘러싸고 논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해와 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물을 흐르게 하는 달의 주기에 맞추어 짓는 농사와 물과 만나 생명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말라붙게 하고 물을 높은 곳으로 보내 버리는 해의 지휘도 있다. 이 해는 물을 춤추게 하고, 물을 품은 식물을 춤추게 한다. 이렇게 해와 달의 힘을 품고 가물어 갈라진 논 바닥을 버틴 뒤 한 뼘도 안 되는 물속에서 자라는 벼는 건강하다. 이미 유명해진 쌀이다.
겨울에는 또 모습을 바꾸는 물은 날이 추운 날 몸을 긴장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세워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물을 품은 자리에서 서리가 돋으면 품고 있는 물을 끌어올려 날카로운 결정을 만든다. 그리고 그 한 층 아래, 추위를 견디지 못한 곤충들의 시체들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수달은 얼음을 깨고 잠수해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얼음 아래 논의 물속에도 생명은 계속 순환하고 있다. 그래서 물을 품은 논은 사계절 생명의 터전이 된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 죽은 삶 위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겨울, 얼어붙은 아이의 뺨 뒤로 보이는 자전거는 비어있었다.
물을 생명을 표현하고 보여주는 생명 그 자체, 모든 생명은 얽혀있다. 우리는 물이고 믈과 함께 다른 생명들과 얽혀 있다. 물은 알고 있고, 그래서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끝이 없는 생명의 순환, 그리고 순환하는 동안에만 살아있을 수 있는 물.
그렇게 화포천과 논의 생태계를 살려내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뜬금없는 덧글 1
영상을 찍는 카메라 하고 하는 것이 만들어진 뒤 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식물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촬영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식물의 움직임과 성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살면서 수십 번은 넘게 본 식물의 성장 영상이지만, 물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하니 이 물이 식물을 통과하며 식물이 성장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준다는 생각을 하니 새롭게 보인다.
뜬금없는 덧글 2
영화는 자연다큐와 복원해야 하는 그때를 보여주는 어린 노무현, 그리고 그때를 돌아보면서 지금을 재건하고자 하는 은퇴한 노무현: 영화는 이렇게 크게 세 덩이로 나뉘어 있으면서 이 모든 시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시간에는 방향성이 없다. 아,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오늘의 '나'가 있고, 나중에 오늘의 '나'를 추억하는 미래 시점의 '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동시성 속 자연은 어떤 방식으로 반응할까? 물은 그 모든 기억을 어디에 저장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