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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의여명 Jan 17. 2023

지금 누구의 시선으로 보고 있나요?

오카!(2011) - 라비니아 커리어


바야카 언어로 <듣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오카'.


미국의 민속음악학자 '루이스 사르노'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시작부터 꾹꾹 눌러 써 둔 글을 보고, 자연스럽게 '루이스 사르노'가 누구인지 그리고 영화의 어디까지가 영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인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엔 그 질문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일이 인생의 전부인 듯한 뉴욕의 민속음악학자 래리가 어느 날 청각장애 진단을 받고 청력을 잃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간도 망가졌다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앙아프리카에 사는 바야카 피그미족 음악 전문가인 그에겐 아직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마지막 전설의 악기 '몰리모'가 남아 있다. 치료보다 그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중요한 래리는 후원자의 마지막 수표를 받아 들고 중앙 아프리카로 출발한다. 그의 트렁크에는 녹음장비와 최소한의 소지품, 그리고 바야카 족 사람들을 위한 선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위험한 곳이라 알려져 있는 야몬도 지역의 열대우림에 사는 피그미족인 바야카 (Aka, Biaka, Babenzele 모두 같은 부족을 뜻하는 말) 부족 사람들은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들은 숲의 가장자리 밖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변화를 받아들인 숲 밖 반투족의 핍박을 받고 있었고,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족의 지도자인 사타카는 부인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 찾을 수 없었다. 중국의 벌목업자와 손을 잡은 반투족과 반투족의 리더는 근대화와 문명화를 부르짖으며 국가 시스템을 빙자한 배 채우기에 여념이 없고, 서양의 신기한 물건들에 눈이 먼 바야카 사람들은 오랜 친구였던 래리의 손에서 하나라도 더 얻어가려고 다투고 있으며, 어떻게든 더 많은 나무를 베어 가야 하는 벌목업자는 숲을 바야카 족에게서 빼앗기 위해 그들의 코끼리 사냥을 이용해 환경단체에 제소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영화 전반부 산길을 헤치며 달리는 버스 옆으로 피어 있는 노란 꽃들은 아마도 우리에겐 이름만 익숙한 아카시아 나무의 꽃들인가 싶었다. 그 외에는 영화 속 중앙아프리카의 열대우림에서 알아볼 수 있는 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바야카 부족들을 보듬어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숲의 아무렇지 않은 너그러움은 낯이 익다. 그리 길지 않은 인간들의 역사에서 산으로, 숲으로 같은 인간을 피해 도망가 자리 잡은 자들이 바야카 족이 처음이 아님에서다. 지금도 숲으로 살길을 찾아 도망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TV만 켜면 대한민국 방송 수많은 채널 중 한 곳에서는 들을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끝일 수 도 있겠다는 걱정이다. 앞으로는 도망갈 숲이, 품어줄 숲이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 중국인 벌목업자가 베어내는 나무의 크기와 양은 엄청나다. 그리고 그걸로 부족하여 근처 부족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아니 두려워하는 바야카 족 숲의 나무를 탐낸다. 바야카 족을 숲에서 꾀어내고 마을에 자리를 내어주고 조금씩 흘리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숲의 삶이 가졌던 가치를 폄하하여 그들 손으로 자신의 숲을, 자신의 나무를 내어놓도록 종용한다. 래리는 그들과 싸워 부족민들을 숲으로 되돌리기 위한 사타카의 무기였다. 비유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미혹에 빠진 이들에게는 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악마 혹은 악마와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니, 래리의 입에서 나오는 사타카의 소리는 그들에게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사타카의 전략이었던 것이 아닐까?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고 박제하려는 영화 속 백인 래리, 변화는 기회라 그 틈에서 최고의 이익을 벌어드리려는 벌목업자, 새로운 시스템을 눈치 빠르게 받아들여 내 주머니를 채우는 반투족의 시장 바순, 변화가 내 입맛에 맞게 이루어 지는 듯하여 눈에 뵈는 게 없는 반투족 사람들, 떨어지는 것이 콩고물인 듯하여 내어 주는 것에 내가 가진 가치를 팔아넘기는 마을생활에 적응해 가는 바야카 사람들… 모두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다. 몇 번이고 만나본 사람들 같다. 그들의 사고와 마음과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의 이유까지도 다 알 것 같다. 그들 모두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모두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들이라 오히려 변화하지 않는 그대로의 숲의 모습을 못 보고 넘어갈 뻔했다. 아니, 숲을 알고 싶어 하기 전이라면 숲의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있는 숲, 보듬어 주는 숲, 살아있는 숲과 살아가는 숲, 함께 사는 숲, 그리고 사라져 가는 숲의 이야기는 숲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에 묻혀버렸을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은 생각은 사라져 가는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품고 있는 숲이야 말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래리의 녹음장비로는 담을 수 없는, 언젠가는 정말 하드드라이브 속 0과 1로 된 소리로만 남아 그 전체를 차마 상상할 수도 없을 그 숲이 100년 뒤에도 주인공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진정으로...




뜬금없는 덧글 1


영화에 대해 좀 찾아보다가 루이스 사르노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3년에 만들어진 '루이스 사르노의 숲의 노래'라는 영화로 2014년 11회 환경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고 한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길은 요원하지만, 언젠가 꼭 한 번 찾아서 보고 싶다. 가능하면 숲에서…

http://songfromtheforest.com/


뜬금없는 덧글 2

부족의 지도자인 사타카가 뉴욕에 있는 래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으나 뭔가 당연하게 가능했으려니 하고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아마 내가 혹은 관객이 생각하는 소위 말하는 '미개' 혹은 '전근대'적 부족사회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는 초현실적인 능력이 아닐까 싶었다. 이백 년 전 유럽인들이 아시아 인들에게 가졌던 오리엔탈리즘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문화를 소비하는구나 하고 내가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주절주절 덧붙여 본다.



뜬금없는 덧글 3

2004년에서 2009년까지 프라하에서 음악영화제를 운영했었다. 대부분이 다큐멘터리였지만 몇 안 되는 극영화는 딱 이런 느낌을 가진 영화들을 초청해 상영했었다. 숲의 영화를 소개하는 지금, cinewald at dawn에도 너무나 어울리는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리카에는 그다지 인연이 없지만 여러모로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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