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바쁜 걸음을 이어가는 대 도시 한가운데에서도 시간이 멈춘 듯 한 장소들이 있다. 높은 빌딩들 사이 녹색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공원에는 나무가, 호수가, 작은 정자가 있다. 비라도 내리면 정자 속 공간은 그대로 잘라 놓은 것처럼 현실과 멀어진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특별한 공간에서 조금은 이상한 인간들이 만난다. 아니, 그곳에서 만나 이상해졌다.
구두장인이 되고 싶은 타카오는 비가 오는 날이면 오전 수업을 빼먹고 신주쿠의 공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초콜릿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는 단가를 남기고 자리를 뜬다. 장마가 시작되고 자주 만나 아침도 나눠먹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은 이제 비가 오는 아침이 반갑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 15살의 고등학생인 타카오는 불안한 미래를 고민하며 이미 어른인 그녀와의 거리를 걱정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도 모른 상태로 장마가 끝났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타카오는 마음을 정리하고 한 발 다가가 보기로 한다.
지하철과 철도가 얽혀 있고 높은 빌딩이 가득한 도쿄의 신주쿠지만 동전 하나만 있으면 숲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잘 관리된 정원이라 그런지 그곳은 수양버들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고 늘어진 단풍나무 잎들이 하늘을 가리다가 고개를 돌려 수면을 두드리는 건강한 나무들이 가득한 숲이다. 정자 주변의 조릿대와 등나무, 아마도 동백일 듯한 반짝이는 잎의 나무와 팔손이나무도 각자 자신의 모양새를 뽐내며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다. 둘을 보는 시선이라고는 박새와 허물 벗는 매미 외엔 나무들 뿐이라 두 사람은 가장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공원이, 자연이, 비가 만들어낸 마법 같은 순간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만든 1시간이 채 안 되는 애니메이션이다. 어디를 보아도 그의 영화인 듯 스쳐 지나는 순간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 위로 그려진다. 공원 속 자연은 꽤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비가 오는 여러 모습이 생생한 소리와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 이렇게 세심하게 묘사된 자연을 만나면 반갑다. 단순히 배경으로 뭉개진 초록색 덩어리가 아닌, 하나하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애정을 담아 그려낸 모습들이 사랑스럽다. 초록으로 가득한 포스터도 좋다. 그들 모두가 영화 속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고 걸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그 자리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지만 그 나무들은 그 자리를 지킨다. 언제 돌아와도 괜찮을 수 있도록... 도시는 끊임없이 증식하고 자연을 먹어 삼키지만 남아서 분투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이렇게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 준다.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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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을 잘 모른다. 시조와 민요 말고는 기억나는 형식도 없다. 지금 누가 시조를 짓는가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알고 싶다. 그에 비하면 일본의 하이쿠나 센류, 단가는 지금도 사람들이 짓고 있고 심지어는 영어로도 그 형식에 맞춰 짓는 이들이 있다. 특히 계절 어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하이쿠는 그 계절어들 사전이 따로 있을 만큼 지금도 활발한 장르이다. 영화 속 단가로 인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괜히 멋졌다. 나도 이렇게 우아한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 만요슈 11, 2513
사랑하는 이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 비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니 말만 하라는 답가가 돌아온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 만요슈 11, 2514
뜬금없는 덧글 2
서울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호수와 정자라면 여의도 공원? 지하철과 가깝고 시끄러운 도심 한가운데 고즈넉한 덕수궁? 강남 한복판의 선릉? 일본과는 기후가 꽤나 비슷하고 같이 장마의 영향 아래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장면일 듯하여 생각해 보았다. 10살 정도 차이나는 사제 간의 두근거림이라 조금 지탄을 받을 수 도 있겠으나, 현실에는 더 기괴한 일들이 많으니 오늘은 이쁜 것만 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