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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의여명 Aug 12. 2022

내 맘 속에 살고 있는 영원한 소녀의 이름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 (2017~2019)

우리 집 책장에 꽂혀있는 다섯 개의 연작소설 중 내 손 때가 가장 많이 묻어있는 것은 동서문화사에서 86년에 단편들을 포함하여 총 12권으로 출판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Anne 시리즈이다. (빨간 머리 앤, 그러니까 Anne of Grren Gables는 그중 첫 권의 제목이다) 그리고 나는 캐나다에 잠깐 살던 시절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여행하며 에번리의 모델이라는 샬럿타운과 몽고메리가 살았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고, 그녀의 이름이 붙은 에세이도 두 권을 갖고 있으며  TV시리즈와 영화로 만들어진 앤의 이야기를 세 개 이상 보았다. 그렇다, 팬이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앤 시리즈

7,80년대 태어난 사람들에겐 거의 철수와 영희 수준으로 유명한 이름일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앤은 89년과 90년 동양방송공사에서 방송해 주었던, 50화짜리 애니메이션 속 얼굴로 기억된다. 일본에서 최초 방영된 것이 1979년, 4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남아 21세기에도 각종 OTT채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빨강머리 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아직도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그 주제곡을 흥얼거릴 때면 그 애니메이션 속 앤의 꿈꾸는 듯한 독백들이 생생하게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캐나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Anne of Green Gables는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원작의 스핀오프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으며 원작에 기반을 둔, 아니 앤 이라는 캐릭터에 영감을 받은 많은 작가들이 그림과 에세이, 소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한 영감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넷플릭스의 시리즈, Anne with an E (한국 제목은 애니메이션 버전의 '빨강머리 앤'이 아닌 '빨간 머리 앤'이다) 속 앤과 숲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넷플릭스가 만들어낸 앤은 조금 다르다. 3개의 시즌, 27개의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넷플릭스의 앤은 이전 그 어떤 앤 보다 현실적이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개연성이 부여되었고, 앤은 더 이상 엉뚱하지만 용감하고 귀엽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다. 애번리에 오기 전 힘들었던 삶의 잔재들은 앤을 순간순간 과거 고통스러운 기억의 한가운데로 데려간다. 그 경험들은 앤에게 벗어나기 힘든 트라우마로 기억되고, 그 기억 속 그녀가 뱉어내는 묵직한 단어들은 그녀의 갑옷이고, 힘든 현실을 잊게 만들어 주는 약이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단지 그녀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했고, 회상을 통해 훔쳐본 과거의 앤은 해리성 장애의 초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앤 셜리 커스버트, 마릴라와 매튜 남매에게 입양되면서 커스버트의 성을 가지게 된 앤은, 아마도 그들과 함께 애번리에서 살게 되면서 처음으로 상상 속의 세계와 현실을 연결시키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녀의 상상력, 단지 아름다운 단어들로만 가득했던 그 세계가 그린 게이블즈의 벚나무를 만나 눈의 여왕이 되고, 가문비나무 군락이 미스터리 가득한 유령의 숲이라는 형체를 얻게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숲 속의 산책길을 연인들의 오솔길로 만들었다. 애번리의 자연과 숲은 앤이 외로울 땐 친구가 되어주고, 절망했을 땐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무덤덤한 일상을 판타지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앤의 숲 속에는 벚나무와 자작나무, 버드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있고 제비꽃이 피는 골짜기가 있다. 반짝이는 호수와 얕게 흐르는 개천 가운데엔 여왕의 이름을 딴 작은 섬도 있다.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숲의 이미지는 앤이 만들어 준 그대로이다. 오래된 비밀을 품고 끝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 나를 안아주는 숲, 나를 알아주는 숲,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만들어 주는, 아니 나의 좋은 면을 꺼내어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숲.


그렇게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에번리 마을, 그린 게이블즈에 사는, 빨간 머리를 한 소녀  셜리는 내가 만난 첫 번째 숲 해설사가 되었다.




뜬금없는 덧글 1

머릿속에 남은 노래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이지만 넷플릭스 드라마오프닝에 연주되는 The tragically hip이라는 캐나다 밴드의 노래 'Ahead by a century'라는 노래는 어쩜 이렇게 앤의 이야기와 찰떡궁합인지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을 들쑤신다.


First thing we'd climb a tree and maybe then we'd talk
Or sit silently and listen to our thoughts
With illusions of someday cast in a golden light
No dress rehearsal, this is our lif
You are ahead by a century (this is our life)
You are ahead by a century (this is our life)




뜬금없는 덧글 2

오프닝 노래가 나올 때의 이미지들과 영상 속 나무에 새겨진 글귀도 아름답다. Brad Kunkle라는 작가가 만들어 낸 자작나무와 단풍나무, 올빼미, 여우와 달, 그리고 이름 모를 파란 새이미지들은 환상적이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것 안될 일이지만...)


True friends are always together in sprit 진정한 친구는 영혼으로 언제나 함께다
To sleep in a tree in the moonshine 달빛 아래 나무에서 잠들기
big ideas need big words to express 위대한 아이디어를 표현하려면 위대한 단어가 필요해
A perfect graveyard of burried hopes 희망이 잠들기에 완벽한 묘지




뜬금없는 덧글 3

혹시 넷플릭스 구독자 중 27개의 에피소드를 다 보기 힘든 분들을 위해 시즌1 첫 번째 에피소드를 추천한다. 앤의 희망과 절망, 사랑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운 애번리의 자연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시즌3의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숲해설의 정석과 같은 장면도 소개된다. 숲과 자연이 주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지혜와 철학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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